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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山 張東均 / 실증 고조선본토기 저자
병신년 들어 2월초에 벌어진 이덕일 박사의 명예훼손 공판을 보고 몇 자의 소감을 적는다.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지만 사건의 동기를 제공한 임나일본부설의 저주에 대해서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몇마디의 소회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두고두고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고 평양성의 위치를 소개한 《삼국사기》의 알송달송한 기록을 소개하기로 한다.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연막작전의 일 예가 되기 때문이다.
 

김부식의 이러한 기록의 배경에는 실상 고 평양성은 한반도의 북부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암시는 오늘날까지 해석되지 못하고, 같은 학자들끼리 논쟁만 계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긍정과 부정을 반복하며 해설하였던 김현구 교수의 일명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 대한 논리는 본질이 무엇인지 판단이 난해하여 독자의 시각에 따라서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도 있었다.


그것은 출판사에서 작성한 서평의 일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칫 민감한 논쟁으로 번질 수 있는 역사 해석의 문제에서 저자가 줄곧 객관적 연구 세를 유지했다는 점은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역사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두 가지의 예를 소개드린다.

 

첫째,  한반도의 평양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지 않았다. 또한 요동에도 있지 않았다. 패수의 주변에 등장하는 낙선정과 열수. 선수. 습수도 없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평양성으로 가는 길을 생뚱맞게도 수천리나 떨어진 등주 동북쪽 해상으로 안내하고 있다. 왜일까? 이유는 옛 평양성은 등주 동북쪽 바다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 설을 유도하는데 《당서》를 인용하였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김부식은 평양 동황성에 대해서도 서경의 목멱산중에 있다고 하는데 잘 모른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평양성은 지금 서경이고 패수는 대동강이라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당서》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한나라의 낙랑군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쌓았는데 남쪽으로 패수가 흐른다’고 하였다. 또 《당서》에 이르기를 ‘등주 동북쪽으로 바다를 따라가다 남쪽으로 패강구 초도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 땅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반도의 평양성을 설명하는 말이었을까. 지금의 개성은 고려의 왕경으로 수백 년간을 지났지만 서경처럼 경로를 소개한 일은 없었다. 김부식은 묘청의 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군사를 동원하여 약 1200여명의 반란세력을 토벌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엉뚱한 설명으로 평양성을 소개하는 것일까. 또한 《가탐도리기》에 나오는 패강구. 초도를 지나면 신라 땅이라고 하였다. 이 대목은 《요사》<지리지>의 암연현조를 보면 암연현의 동계(東界)가 신라라는 기록으로 신라가 요동반도의 서쪽에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요사》<지리지> 암연현조는 고 평양성이 암연현(개주)의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왜 김부식은 횡설수설로 평양성의 위치를 설명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감시자의 눈을 피하여 허위사실에 속지 말라는 암시였을 것으로 믿고 싶다. 이것은 불가피한 입장에서 선택한 김부식의 변명이라고 본 선의의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반대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질타하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의외로 그 피해가 오늘날까지 큰 혼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不可知其然否]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 何以知之 唐書 云 平壤城 漢樂浪郡也 隨山屈?爲? 南涯浿水 又 志 云 登州東北海行 南傍海?過浿江口椒島 得新羅西北 <삼국사기 지리 4>


 

▼ 고구려의 고 평양성과 후에 서경으로 바뀌었다고 기록한《大明九邊萬國人跡路程全圖》/ 1663년 청 왕군보(王君甫)작

이지도에는 우측 바다에 고평양(古平壤)과 후 서경.원의 동령로와 당의 안동도호부, 원 총관부등이 세개로 나누어진 섬에 표시되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평양을 산동반도 북동쪽의 섬으로 표시하고 있는가.그 진실을 규명하면 고조선의 실체가 밝혀진다. 그 경위를 《우공추지(禹供錐指)》를 통하여 알아본다.

 


《우공추지》권4 요동.낙랑.삼한.기자국의 위치《우공추지》/권04 (8)

청주의 동북계를 다 고찰할 수는 없으나 《소》에 이르기를 바다를 건너서 요동 땅이 있다고 하는데 완벽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통전》에 이르기를 청주의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에 걸쳐있고, 태산 동쪽으로 밀주를 거쳐 동북쪽으로 해곡(海曲)을 경유한다. 내주에서 요동과 바다사이에 낙랑과 삼한의 땅이 서쪽으로 요수까지 미친다. 이것은 먼 옛날부터다.

 

현도군은 침략자 한무제 때 낙랑군과 같이 열렸으나 남아있지 못했다. 이곳은 모두 우이의 땅이다. 청주지역에 있던 땅들은 삼한에 포함 되지 않는다. 모든 우이는 희화가 살던 곳으로 기자가 봉해졌던 조선이다. 그들은 외부와의 동화에 불응하였다.

 

이와 같은 낙랑군과 기자조선의 위치가 산동반도의 동북쪽 바다안에 있었다는 사료가 존재하는데도 한사군의 위치를 막무가내로 한반도로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한 기록은 한국의 민족사서인 《규원사화》의 <만설>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상서》의 <요전(堯典)>에 이르기를 '따로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夷)의 땅에 머물며 다스리게 하니, 그 곳이 바로 양곡(暘谷)이다'라 하였으며, <우공(禹貢)>에 이르기를 ‘해대(海岱)는 바로 청주(靑州)인데, 우이(禹夷)가 이미 그 곳을 다스렸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동방의 사람들이 해대 사이의 땅을 차지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기주(冀州)에는 가죽 옷을 입은 도이(島夷)가 있었는데, 이는 곧 동방의 사람들이 발해 서북의 뭇 섬으로부터 기주 바닷가의 땅으로 옮겨가서 거처한 것을 말한다.

 

양주(揚州)에는 풀 옷을 입은 도이(島夷)가 있었는데, 이는 곧 동방의 사람들이 양주 동쪽의 뭇 섬으로부터 강회 사이의 땅으로 옮겨가 거처한 것을 말한다. 또한 목축을 하는 래이(萊夷)와 진주나 비단 명주 등을 거래하는 회이(淮夷)가 있었는데, 이는 또한 동방의 사람들이 양편 지역의 형세를 살펴 가며 편한 곳을 따라 삶을 꾸려 가던 한 모습이다.

 

상고 시대에는 인심이 소박하여 비록 다른 종족이 이웃하여 있어도 비상시가 아니면 반드시 자기들의 생업을 지키며 서로 침범하지 않고 서로 그 형세를 보고 있다가, 만약 힘의 균형이 두드러지게 차이나거나 정치가 어지러워 반목하게 되면 곧 반드시 전쟁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것은 바로 흘달 임금이 군사를 빈*기로 보내고, 물리 임금이 은나라 땅에 제후를 세운 것 등이다. 내가 이러한 까닭에 상고 시대 우리 선민들의 용맹스러운 무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다음은 《규원사화》<단군기>의 삼신산에 대한 기록이다.이 삼신산은 바로 등주의 동북쪽 바다에 있는 고조선 즉 고 평양성(서경)을 설명한 기록이지만 본질을 흐리기 위해서 긍정과 부정을 혼용하는 기법을 썼다.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진위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렇듯 사료란 직설적으로 기록하기 어려울 때 이와 같은 암시방법을 써왔다. 이러한 암시 기록은 아직까지도 해독되지 못한 채 위서로 매도되어 식민사관 학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옛 평양성은 이름만 한반도로 옮겨져 세상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예전의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다. ‘삼신(三神)’ 또는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에 와서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대저 신시 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로 신의 교화가 점차 세월에 따라 더욱더 깊어 감에,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경영하는 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는 자못 다르게 되었기에, 그 신성한 풍속이 멀리 한나라 땅에까지 퍼져서 한나라 땅의 사람 가운데 신의 교화를 사모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로지 삼신을 추앙하여 동북 지방에는 ‘신명의 집(神明之舍)’이라는 명칭까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단의 폐해에 이르러 곧 점차 허무맹랑함에 빠지고 더욱 기괴해지더니 괴이하고 허망한 말들이 꼬리를 물고 갈마들어 나왔는데, 심지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바다 위에 신선의 술법을 닦는 괴이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해지기까지 하였다. 무릇 그 땅은 우리의 진방(震邦)과 더불어 서로 접해 있어서 백성과 사물의 교류가 특히 왕성한데, 직접 그 풍문을 듣고는 놀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또한 생각을 미루어 넓히고 억지로 이치에 맞춰 말하기를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 증거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결국에는 능히 다다르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주목을 미혹케 하였다.《신선전》에서는 또 ‘海中’이라는 글자만으로 추측하고 단정지어 말하기를 '바다 위에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방장*영주산이라 하며, 이를 일컬어 삼도(三島)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해상(海上)’이나 ‘육오(六鰲)’ 등의 황당무계한 말들이 한가로운 사람들의 붓 끝에서 연이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다시 그것을 억지로 흉내만 내어 ‘금강산이 봉래산이며, 지리산이 방장산이고, 한라산이 영주산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선비가 뱉은 침을 도리어 받아 곱씹는 격이다.

 

《사기》의 <봉선서>에 말하기를 ‘삼신산이란 발해의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전해진다. 무릇 가본 적이 있는 사람에 의하면 뭇 신선들과 불사의 영약이 모두 있으며, 그 곳의 사물과 짐승들은 모두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으며……’하였고, 또한 선가(仙家)의 서책에서 혹은 말하기를 ‘삼신산에는 넋을 부를 수 있거나 먹으면 늙지 않는 등의 풀이 있는데 일명 ‘진단(震檀)’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무릇 제나라와 연나라의 선비들은 신비하고 괴이한 말에 깊이 현혹되고 또한 이를 높이 여겼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및 연나라의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보내 삼신산을 찾게 하였으니, 진(秦)과 한(漢) 때의 송무기(宋無忌)*정백(正伯)*교극(僑克)*상선(尙羨)*문자고(門子高) 같은 무리는 모두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오리(五利)*공손경(公孫卿)*신공(申公) 등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옛날 태공(太公)이 제나라를 다스리며 도술을 닦았더니, 뒷날 그 땅의 사람들이 도술 부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곧 이것은 또한 태공이 세상의 풍속을 그렇게 이끈 것이므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이한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순암 안정복 초상
다음은 《삼국사기》와 《고려사》를 싸잡아 질타한 안정복의 신란한 비판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나 《고려사》로는 국읍과 산천을 고거(考據)할 수 가 없을뿐더러 심할경우에는 원근을 전도하고 남북을 바꾸어놓았으니 믿을 수 있는 책으로 볼 수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만약 그 죄를 벌한다면 어느정도의 형벌이 필요할 것인가. 이러한 비극들은 국력이 강하였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국가가 독립한 이상 애매모호한 사대주의 사관들은 발본색원되어야 한다
 

참고로 《동사강목》은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하는데 커더란 영향력을 미쳤고, 고종황제께서 집경당에서 강독을 받던 사서다. 이와같은 안정복의 비판은 김부식이나 정인지의 후손들에게는 모욕적인 사건이었지만 송사를 벌려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배나무 아래에서는 모자를 고쳐 쓰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비판능력이 약한 일반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애매모호한 표현은 저자에게도 일부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 한다.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라는 제목의 뉴앙스는 전체의 설명을 제쳐둔다면 임나일본부설은 실제라는 암시를 불러올 수 있는 제목이다. 저자는 책의 내용에서 제목인 임나일본부라는 설을 부정하고 대신 남선경영논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주장하였다면, 이는 간접적으로 남조선의 일본 연고권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사실도 아닌 허구론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대한다면 이는 임나일본부설보다 진화한 학설이 되는 것이 아닌가.

 

김현구 교수 “나는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을 부정한다”

하지만 이덕일 소장은 “김현구 교수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현구 교수가 자신의 책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서 일본학계의 남선경영론이 더 타당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김 교수가 ‘남선경영론은 남조선경영론의 줄임말이니, 한반도 남부경영론으로 부르는 게 타당하다’고 써놨으니, 이는 의미가 같은 두 용어를 갖고 말장난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과 한반도 남부경영론은 다른 것인가?

이 소장은 “김현구 교수가 결국 뭘 말하고 싶은가를 봐야 한다”고 했다. “김현구 교수는 가야를 지배한 게 백제인데, 결국 그 백제를 지배한 것이 야마토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덕일 소장이 근거로 제시한 근거는 이렇다....하략

 

이를 객관적 입장에서 평한다면 만약 저자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학위(대화정권의 대외정책 연구)를 받지 않고 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근무한 경력이 없었다면 피고는 이렇듯 김현구 전 교수를 식민사학자로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피고가 근간 동북아역사재단의 폐단을 고발하고 저격수로 활동한 사실이 없었다면 이렇듯 과격한 입건과 선고는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역사의 해석으로 야기된 사건을 사법부에서 역사논쟁이 아니라 일부사실을 왜곡하여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판결하는 선례를 남긴다면 앞으로 수많은 송사가 예상된다. 담당판사의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 판사는 김 전 교수 저서의 전체적 내용은 임나일본부설을 배척하는 내용임에도 이 소장이 자신의 출판 목적에 맞게 일부 사실을 왜곡해 김 교수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이 소장은 이에 대해 자신의 기술은 김 전 교수를 비방할 목적이 없이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6개월 징역에 2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한편 안정복의 《동사강목》의<지리고>에서 정인지가 저술하였던 《고려사》는《삼국사기》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여 만들었으므로 국읍과 산천을 고거(考據)할 데가 없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원근을 전도하고 남북을 바꾸어 놓았으니 믿을 수 있는 역사책이라고 하겠는가? 라고 질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소장은 2014년 9월 출간한 저서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김 전 교수의 저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를 다루면서 그가 한국 고대사를 기술할 때 일본 극우파 시각에 동조했다는 허위사실을 써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소장은 김 전 교수가 저서에서 '일본이 고대 한반도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수용했다고 주장했다.과연 이러한 주장이 옳은 것인지 당시 출판사의 서평을 소개드린다. 이 서평은 송사가 있기 전에 작성된 것이다.

[알라딘 제공] 2011/02/01/ 출판사 서평(총론)

이 책은 일본 고대사와 한일관계사 분야의 권위자인 고려대 김현구 교수가 '임나일본부와 고대한일관계'라는 주제로 강의해온 내용을 일반인의 시각에 맞춰 풀어쓴 책이다. 고대한일관계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장점 이외에도, 자칫 민감한 논쟁으로 번질 수 있는 역사 해석의 문제에서 저자가 줄곧 객관적 연구 자세를 유지했다는 점은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역사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임나일본부설 다시 읽기

임나일본부설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임나 지방)를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당시 백제 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는 20세기 초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하여 스에마쯔 야스까즈 등의 일본 학자들이 『일본서기(日本書記)』 등의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엮어내 '한반도 남부경영론'이라는 주제로 집약하고자 했던, 식민사학의 대표적 사례다.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을 단순히 날조로만 보는 우리 사회 한편의 시각을 경계한다. 이는 물론 강제병합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겠지만 그동안 한국사회에서는 이를 객관적으로 조명하고자 시도하지 않았으니 이것 또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다소 도발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이 책의 제목에는 고대한일관계사가 대중적으로 공유되지 못했던 이와 같은 사정을 안타까워하는 저자의 마음이 담겼다. 하여 저자는 일본 학자들의 대표적인 주장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차근차근 제시하며 이를 차례로 논박한다. 각론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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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02-12 11:5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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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견(총 4 개)
  • guest2018-01-31 00:15:46

    임나일본이란 말 자체가 근대에 만들어진거야 일본과 중국은 우리를 지배하려 역사왜곡 중궈 한족은 모두 동이족이고 한족이란 자체가 없었다 왜냐면 한나라 석기헌원=청동기치우 누가 이기겠음 이때부터 중원역사가 삐뚤어짐 중원엔 단한번도 한족국가가 없었음 이런고로 알고 해석 바람 신라의 중국 장강 중류에서 하류까지 지배 별자리 이동으로 한반도로 들어옴 동쪽으로 가야 천인이 나와 잘산다는 천문지리로 인해 고구려 백제 신라 한반도로 이동 삼국 천문도부터 풀어보고 역사 왜곡하셈 바보들 ㅋㅋㅋ 매국노 니들 아무리 떠들어도 증거가 요렇게 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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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uest2018-01-31 00:04:30

    맞다았다 또 거석문화의 중심이 한반도 모든 고인돌 종류 한반도에 다 있음 세계의 고인돌은 여기서 퍼져나간 발전 형태의 고인돌 세계 모든 언어의 고향은 동이족 언어라고 세계언어학자 100년 연구 결과 유네스코 등재 인정 이런대도 파나류는 흑수 천해 터어키설과 파미르고원설 그때는 세계 거대화산폭발로 해심이 140m 아래였다 그래서 환12국중 파나류국만 못 찾는거야 부도지에 어느날 동시에 동서남북으로 떠나 왜일까? 본국은 남고 일부가 떠나는게 상식 바닷물이 차올랐거든 이런거부터 생각하고 개솔해라 가야 백제무당이 큐우슈우 소국들에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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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uest2018-01-30 23:56:34

    삼국유사만 남겨 주었을까? 역사서 30만권을 불태우면서 거기엔 일연스님의 잘못 역사관과 김부식의 신라가 중국땅에 있을때 기록이라 앞뒤가 안맞는거야 일본학자들도 이유를 몰랐지 그래서 이걸 남겨주면 나중에라도 한반도역사를 얼마든지 위서라고 할수 있는 증거로 남겨준건데 알고보니 천문도가 증거를 알려주네 쪽발이 역사론 좆됐음 그리고 세계 최초 문화가 한반도 남서쪽 이어도(파나류국)으로 부터 시작됐는데 일본 중궈 알면서도 왜곡중 역사학자들 정신차려 빙시들아 파나류(파도가 출렁이는 바닷가 르완다어) 파나류국은 천해의 동쪽 큰바다(태평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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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uest2018-01-30 23:48:17

    김부식에 평양은 동북에 있었다는 맞는말 왜냐면 신라가 그때에는 한반도에 없었다 신라는 장강중류에 있었으니 단군의 평양성은 현제 북경시 고북구 밀운면 백단마을 공공성이 평양성이기에 당연히 동북쪽 아닌가 이 옆을 흐르는 강이 조하(조선하) 요하인것이다 정확하게 남동쪽으로 흐르는 중국 한반도 통털어 유일한 남동강(요하)이다 이것도 모르고 다들 개솔들 임나는 허구 일본은 6세기나 되야 나라형태를 갖추는데 어찌 2세기에 한반도를 지배하냐 멍충들아 삼국사기의 천문도부터 컴프터로 풀어봐라 일본넘들이 여기까지는 생각 못한거야 왜 삼국사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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