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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 무덤에서 부활한 고구려 탄생의 비밀 [졸본 패수론] - 졸본은 환인이 아니라 요동만에 있었다.
  • 기사등록 2016-08-13 1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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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山 張 東 均 / 실증 고조선본토기 저자
고구려의 건국지는 송양의 비류국이 있던 졸본으로 알려저 왔다. 그리고 그 졸본을 지금의 환인이라고 교육한다.

수없는 답사단들이 감격하며 다녀온 그곳엔 오녀산성이 있고, 한때 그 높은곳에 수도가 있었다고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외치는 죽은 자의 비석이 발견되었다.

그동안《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주몽과 패수관계는 의외에도 천남생의 묘비를 통해서 밝혀진 것이다. 주몽이 패수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한 것이다.

그가 최초로 고구려를 건국한 장소는 비류수의 지류인 졸본천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장하고 있는 졸본의 위치를 알면 패수의 위치도 자동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전신인 고구려연구재단이 있었고, 그들은 한중수교가 시작되자 요동지역의 유적답사의 문을 개방하고 견인차 역할에 앞장 섰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강역을 찾는 일에는 너무나 애로가 많았다.

다음은 동북아역사재단과 매일경제신문이 공동으로 제작한 교육용 자료를 빌려 패수를 찾아보기로 한다.
패수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면 중국은 이미 답사 길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에서 졸본을 요령성 동쪽, 길림성과의 경계인 혼강의 중상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경계선이 패수가 되어야 하고 한나라와의 국경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주최한 토론장에서 강단측 강사로 출연한 박준형 박사는 혼하 패수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혼하는 본계 자치주에서 서쪽으로 흘러 심양을 거치며 요하로 합류되어 요동만으로 흐르는 강이다. 반면 혼강은 환인의 동쪽으로 흘러 압록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흐르는 강이다.

그런데 연남산의 묘지명(墓誌銘)은 주몽과 패수 연관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메지출전 happy님 블로그

 

『동명은 흔히 고구려를 개국한 주몽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산의 묘지명에 "옛날에 동명은 이군에 감응되어 표천을 건넜고, 주몽은 광명으로 잉태되어 패수에 임하여 도읍을 열었다(昔者 東明感氣 踰俵川而啓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 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있다.

다음은 《요사》<지리지>의 패수 설명이다.

요하(遼河)는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范河)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력(?芋?)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원문생략)

 

그리고 요양현(遼陽縣)은 본래 발해국의 금덕현(金德縣)이다. 한나라 때 패수현(浿水縣)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현(句麗縣)으로 고쳤다. 발해 때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한나라 때 패수의 한계선은 패수현(요양)지역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흐르며 많은 강물과 합류되었던 강이다. 즉 요동지역의 서쪽을 말한다. 따라서 졸본의 위치를 요동의 동쪽(환인)에다 비정하는 것은 역사왜곡이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동명왕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망자 주몽이 세 명의 종자들을 대리고 터줏대감인 비류국왕 송양을 만났을 때 송양왕은 겸손한 태도로 이렇게 말한다. ***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바다 귀퉁이'(寡人僻在海隅)라는 대목을 일반 해석에서는 제외시켜버렸다. 졸본이 환인(桓仁=혼강)이라는 통설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백과사전들까지도 해설에서는 빼버리고 입을 다물고 있다. 졸본과 혹은 홀승골이란 지명은 조선(朝鮮)과 상통하는 뜻을 가진 달이 지고난 후 아침을 뜻하는 말이다. 주몽(朱蒙)또한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뜻한다.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여기서의 말갈(靺鞨)은 속말수(소머리강=우수하=개주하)주변에 살던 말갈을 말한다.


(인자수지연산도)  졸본은 개주 서쪽으로 흐르는 압록강(비류수. 졸본천. 소요수)의 서쪽 소택지역에 있었다. 주변에 안시성(환도성)과 주몽의 출생지 웅심산(웅악산)이 있다.


녹주 압록군은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 옛 도읍이며 발해는 서경압록부라고 불렀다. 성의 높이는 3길이며 너비는 20리나 된다.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정주(正州) 등 4주의 일을 관할하였다. 옛 현은 신록(神鹿)·신화(神化)·검문(劍門)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머지 잔당들을 상경으로 옮겨 역속현(易俗縣)을 두어 거주시켰다. 호구수는 2,000이며,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4주와 2현을 관할하였다.

1) 홍문현(弘聞縣)

2) 신향현(神鄕縣)

3) 환주(桓州) 고구려 중도성(中都城)으로 옛 현은 환도(桓都)·신향(神鄕)·패수(浿水)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고구려 왕은 여기에 궁궐을 처음 세웠는데 나라 사람들이 신국(新國)이라고 불렀다. 5대손 소(釗 ; 고국원왕)는 진(晉)나라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년에 모용황(慕容皇)에게 패하고 궁실이 불타버렸다.
호구수는 7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는데, 녹주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떨어져 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의 기록에 따른 고구리 도읍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동명성왕 원년(BC37) 졸본성에서 40년을 지낸다.
유리왕 22년(3)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겨 425년을 지내고,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156년을 지내고,
평원왕 28년(586)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겨 83년을 지내고,
보장왕 27년(668)에 멸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BC 26년 “도읍을 졸본(卒本)으로부터 눌현(訥見)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눌현 천도 기사는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위 <잡지> 기록에는 산상태왕 “13년(209) 겨울 10월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겼다”는 기록과 동천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읍 환도성이 불타 “21년(247)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는 기록도 누락되어 있다.

 

고국원태왕 12년(342) 가을 8월 환도성을 다시 이거하였다가 13년(343)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겼고, 장수태왕 15년(427) 평양으로 옮기게 되는 것인데, 고구려의 천도 기록이 <삼국사기 잡지 지리>에는 상당 부분 누락되어 있다.※ 만약 한반도에 평양성이 있었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동천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읍 환도성이 불타 “21년(247)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는 기록도 누락되어 있다. 낙랑군은 서기313년에 망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고구리의 도읍이었던 환도에 대해서는, <환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 “번한의 옛 도읍은 개평부 동북 70리”라 기록되어 있어 번조선의 도읍이 안시 임을 알려주고 있다.

<삼국사기>에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며 환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도 “안시는 곧 환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안시 = 환도이므로 안시성을 찾으면 고구려의 도읍 환도성은 저절로 찾아질 것이다


고구리 400년 도읍 국내성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 21년(2) 도읍 졸본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중 제물인 돼지가 달아나 국내 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붙잡았는데, “그곳의 땅이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고 지세가 험해 병란의 걱정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는 곳이 바로 국내성이다.

 

이 말은 졸본에서 국내성은 돼지가 달아나다 잡힐 정도로 그리 멀지 않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高句麗) 광개토태왕의 도읍지였던 국내성(國內城)은 과연 어디였을까? 이곳이 졸본이었을 가능성은 크다.


<청유조변도  만리장성의 동단은 산해관> 요동만 이전의 대요하 모습과 졸본의 위치 추정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제작년 : 702년(주(周) 측천무후(則天武后) 장안(長安) 2년).
출토 및 소장 : 1922년 낙양 출토, 북경대학교 원고고학실 소장.
형태 : 정방형. 탁본 ? http://goo.gl/CCq57
                                                                 (원문생략)


[비문내용]
대주(大周)의 고(故)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행영선대장(行營繕大匠) 상호군(上護軍)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군(君)의 휘(諱)는 남산(男産)이니 요동(遼東)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비록 성진(星辰)과 바다와 산악이 변방지역[要荒]에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절과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하여, 가(家)를 잇고 씨(氏)를 받았으니 군(君)은 그 후예이다....중략

 
넓고 신령스러운 바다여, 백천(百川)이 모이는 곳. 동명(東明)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 호(胡)를 위혁하고 맥(貊)을 제압하였으며 서주(徐州)와 통하고 연(燕)을 막았도다. 험준함과 굳음에 의지하여 예부터 옮기지 않았는데 이에 당(에 귀속하게 됨)에 미쳐 동호(東戶)로 화했도다. 용발(溶渤)을 복종하여 인도하고 수호(水滸)를 편안히 따르게 하니 남이(藍夷)가 만나 하나가 되고 계루(桂樓)가 바로잡혀 두루 미치는구나(?). 그만이 굳건하고도 오랫동안 우리 관직을[龜組] 받고 마침내 고가(藁街)에서 영예를 누리게 되었고 아에 대신(大臣)의 반열(?)에 올랐도다. 훌륭한 저택에서 살면서 아침을 맞고 황제의 주위에서 아침마다 배알하니 훈공이 상서(象胥)로서 성대하구나.


총애가 황제에 두루하여 이에 청사(靑社)에 봉지를 받았으나 산하(山河)가 안으로 끊어져 요양(遼陽)이 어찌 허락할꼬? 고국을 그리며 마음을 상하니 종의(鍾儀)의 영원한 한(恨)과 장작의 슬픈 신음. 비단으로 싼 나무 창으로 깃발을 달아 벌려 놓고 옥을 차고 금을 허리에 차도 종고(鐘鼓)의 깊은 근심, 추억이 깊은 숲을 넘어가고(?) 머물러 고독함을 노래해도 제수(濟水)와 원수(洹水)가 원망스럽구나. 성명(聲明)이 영원히 끝나도 가성(佳城)은 영구하여 몸을 망산에 맡기니 떠도는 혼은 멀기만 하도다.(?) 유석(幽石)에 명(銘)을 새기니 애통한 전기(傳記가 불후(不朽)하도다.

 

통직랑 한성형 개국자, 천광부 나이 18세. 장안 2년(702) 4월 23일 낙양현의 경계에 묻다.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비록 성진(星辰)과 바다와 산악이 변방지역[要荒]에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절[?豆]과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하여, 가(家)를 잇고 씨(氏)를 받았으니 군(君)은 그 후예이다.
- 중략 -

 

부색[扶索]이란 무슨뜻일까. 부(扶)는 동해의 해뜨는 나라 부상(扶桑)을 뜻하고 색(索)이란 신선들이 먹는 반도(蟠桃)가 나는 도색산(度索山)을 뜻한다. 일명 삼신산이다. 따라서 도색산(度索山)이란 사문도의 평양성을 말하는 것이다.

도색산이란 산명은 《사기》<오제본기>전욱편에 보인다. 注?集解海外經曰:「東海中有山焉,名曰度索。上有大桃樹,屈蟠三千(十)里。 東北有門,名曰鬼門,萬鬼所聚也。

 

국사편찬위원회는 부색[扶索]이란 대목의 해석을 "의미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부상(扶桑), 즉 해뜨는 곳의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고 하므로서 삼신산에 있던 평양성의 위치를 밝히지 못했고, 천남산이 '요동조선'인이라고 밝힘으로서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던 근거는 무너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역시 요동에 있던 조선의 제후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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