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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순례] 용국사 주지스님이 전하는 논개 이야기 - 최경회 두 번째 정실부인, 양반사회가 ‘기생·첩실’ 폄하해
혜법스님 “논개는 지장보살, 미륵전 건립해 한 풀어줄 것”
  • 기사등록 2017-07-31 17: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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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칠원읍 예용1길에 위치한 용국사 대웅전. 절 주위에는 수십년째 가꾸고 있는 백일홍이 심어져 있다.

역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영국의 역사학자 E.H.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올바로 이해했을 때 인류가 현재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경남 함안의 용국사 주지 혜법스님은 그간 우리가 외면해 왔던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혜법스님은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기반에 둔 양반사회가 정실부인 논개를 기생으로 만들고 진실을 왜곡했다”고 탄식했다.

흔히 논개(論介)는 임진왜란(1592~1598년)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로운 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1620년경 유몽인의 ‘어우야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문헌을 보면 논개는 ‘진주 관기’로 표기돼 있다. 그는 논개가 왜장을 죽인 공적을 세웠음에도 기생이라는 신분상의 이유로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이후 18세기 초 경종 때 의암사적비를 세워 논개의 순국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의로운 기생이라는 뜻의 의기(義妓)로 불리게 됐다. 19세기 들어 논개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고, 이중 진주성 싸움 도중 전사한 ‘최경회의 첩’이었다는 의견이 현재까지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혜법스님은 “논개(신안주씨)는 임진왜란 때 병마절도사로 진주에 부임한 최경회(해주최씨) 현감의 두 번째 정실부인”이라며 “양반집 부인이 기생처럼 분장해 왜장을 안고 물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 가문에 흉이 될 것을 우려한 문중이 논개를 기생이나 첩실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혜법스님은 해주최씨 가문에서 족보에 논개를 첩실로 기록한 사실을 알고, 문중을 설득해 정실부인으로 다시 고쳐 족보에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신안주씨 족보에는 논개와 그의 부모, 조부모에 대한 기록이 없다.

기록에 따르면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최경회와 논개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의병들이 시신을 거둬 신안주씨 집성촌인 경남 안의현(함양 옛 지명) 서상면 방지마을 당산 뒤쪽 골짜기에 묻었다고 한다.

혜법스님이 지장경을 사경(寫經)하는 모습.

혜법스님은 논개에 대한 역사적 사실보단 관광상품화에만 열을 올리는 지방자치단체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매년 ‘진주논개제’를 개최하고 있는 진주시청에 연락해 논개가 기생이 아닌 둘째 정실부인으로 사실을 바로 잡아줄 것을 요구했지만 ‘유몽인의 어우야담’을 근거로 기생이 맞다며 거절당했다”고 씁쓸함을 자아냈다.

혜법스님이 다른 사람도 아닌 ‘논개의 원찰(願刹,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을 위해 오랜 세월동안 심혈을 기울여 온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논개영혼’을 모신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어머니는 16살 꽃다운 나이에 40세였던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 됐다. 엘리트였던 아버지는 첫째부인이 요절하자 가난한 집안의 어머니를 둘째부인으로 맞았다. 어머니는 23살 때 ‘논개영혼’이 와 위패를 모시면 부처가 돼 집안의 재앙을 막아 주겠다고 해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로 인해 혜법스님의 집은 멸문의 화를 당했고, 아버지도 7년 후 돌아가셨다고 한다. 3년 상을 치른 어머니는 논개 위패를 모셨다.

혜법스님은 “6.25 전쟁 때 내가 태어났는데 7살이 됐을 때 어머니와 같이 ‘논개 위패'를 모신 후로 어느 덧 62년이 됐다”며 “어린 나이에 둘째 부인이 된 어머니를 생각하면 논개의 삶과 닮아 있어 마음이 아프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논개에 대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이라며 혜법스님은 담담히 말한다. 혜법스님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대웅전 실내 모습.
나반존자(독성불). 혜법스님은 어머니의 모습을 본따 독성불을 새겼다.

혜법스님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병이 나 6개월간 누워 지냈다고 한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가난때문에 학업을 접어야 했다.

20대 때는 가수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단 생각에 당시 히트곡인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한 이시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음반을 내기도 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니란 생각에 포기하고 불자가 됐다고 한다.

검정고시로 방송통신대학교에 들어가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한 그는 50대에 승가대에 들어가 4년간 교육과정을 거쳐 스님이 됐다. 현재는 함안군 칠원읍 예용1길에 위치한 용국사 주지를 맡고 있다.

용국사 주변에는 수만포기의 백일홍이 심어져 있다. 백일홍은 한문으로 자미화(紫微花)다. 자미궁(紫微宮)은 큰곰자리를 중심으로 170개 별로 이뤄진 별자리인데 옥황상제가 사는 곳이라 전해진다. 백일홍은 생전에 그의 어머니가 스님 나이 23살 되던 무렵부터 수십년째 가꿔왔는데 꽃 이름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한다.

혜법스님은 백일홍과 관련된 신비한 일화도 들려줬다. 한밤 중 어머니가 스님을 깨워 ‘옥황상제 맏딸이 목병이 나 꽃(백일홍)을 먹고 병이 나았다’며 꽃값을 주겠다고 해 삼천석(억수천금)이라고 썼는데 그 덕분인지 나중에 사찰을 운영할 때 적지 않은 시주가 들어와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혜법스님은 “논개 위패를 모신지 25년 만에 지장보살(支裝菩薩)이 됐다”며 “지장보살은 부처가 열반에 들어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는데 생지장도량을 모신 곳은 국내에서 용국사 밖에 없다”고 자부심을 보였다. 

그는 이달 중순 논개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미륵전을 짓기 시작했다. 미륵전은 2019년 7월 완공될 예정이다. 또 8월부터 논개 관련 책도 집필을 시작할 계획이다.

400권에 달하는 지장경을 매일 쓰고 태우며 수행을 지속하고 있는 혜법스님. 그는 “함안군 등 관련 지자체에서 논개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과 함께 미륵전 건립에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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