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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근의 역사 에세이] 정을 나누는 사람의 향기
  • 기사등록 2026-05-29 11:39:12
  • 기사수정 2026-05-29 12: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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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일상에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적 지혜를 만납니다. 부산경제신문이 부경대 사학과 전 교수이자 (사)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인 허태근 문학박사의 고정 칼럼을 시작합니다. 허 교수는 평범한 일상과 사람의 인연 속에서 역사 속 인물들의 삶과 가치를 읽어내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사학자입니다. 날카로운 사학자의 통찰과 따뜻한 인문학적 문체로 풀어내는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그 첫 번째 페이지를 독자 여러분께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허태근 (문학박사)

• 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

  1. • 전)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2. • 현) (사)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비 오는 오월의 한낮이다.

시간은 정오를 향해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빗줄기가 기장으로 이어지는 산과 바다를 촉촉이 적신다.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바다에는 잔잔한 파도가 낮은 숨결 같은 소리를 내며 끝없이 밀려간다. 평소 사람들로 붐비던 해변 길도 비가 내리자 한결 고요해졌다. 바닷바람 속에는 초여름으로 넘어가기 직전 오월 특유의 서늘하고 축축한 냄새가 스며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런 날이면 사람은 마음 깊숙이 잠들어 있던 기억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게 된다.


나는 평소 일기와 많은 글을 써 왔다. 그러나 오늘 같은 주제는 처음이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마음속 어딘가에서 찾고 있었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자판 위를 움직이는 손끝도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

사람은 오래 살아갈수록 무엇이 진짜 가치인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업적과 명예, 얼마나 많이 이루었는가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결국 사람의 품격은 얼마나 따뜻하게 타인을 품고 살아왔는가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잠시 뒤돌아본다. 평생 공부하고 가르친 삶 속에서 많은 사람과 글을 만났지만 정작 마음 깊이 오래 남는 것은 인간의 온기를 지닌 사람들임을 오늘에야 느낀다. 최근 유엔재단 모임에서 만난 전통음식 장인이자 식품영양학 박사이신 정영숙 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분을 뵈며 문득 조선 후기의 여성 문인 장계향 선생이 떠올랐다. 

 

우리는 흔히 장계향을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 한글로 풀이한 『음식디미방』의 저자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녀 삶의 본질은 단순히 요리와 음식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녀의 가문은 굶주린 이웃에게 집안의 곡식을 아낌없이 내어주며 사람을 살렸고, 음식 속에 인간에 대한 배려와 돌봄의 마음을 담아냈다. 그 바탕에는 부친 장흥효가 지향했던 청빈과 절제, 그리고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던 선비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흥효는 권력과 부귀를 좇기보다 학문과 인간의 도리를 더 중시했던 영남 선비 문화의 한 전형이었다. 그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학문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고자 했으며, 지방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사람을 품는 삶을 선택했다. 물론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시대적 한계 또한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삶 속에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려 했던 조선 선비 특유의 품격이 남아 있었다. 그러한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딸 장계향 역시 음식과 돌봄, 학문과 인간애를 함께 실천하는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영숙 선생님을 만나면 나는 그 오래된 정신의 흔적을 다시 보는 듯했다.

비록 몇 번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분에게서는 보살 같은 마음과 배려를 실천하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단순히 뛰어난 한식 명장이나 학문적 업적을 가진 박사이기 이전에 사람을 따뜻하게 품을 줄 아는 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음식을 권하는 손길에도,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계산보다 정과 배려가 앞서 있었다. 그래서 함께 있는 사람은 단순히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보다 마음 한편이 따뜻하게 위로받는 감정을 먼저 느끼게 된다.


특히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칠월에는 거제로 꼭 오십시오”라는 초청의 말이었다.

그 짧은 한마디에는 사람과의 인연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말 속에서 덕인(德人)의 풍모(風貌)를 느꼈다. 동시에 장계향이 보여 주었던 돌봄의 정신과, 제주에서 굶주린 백성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던 김만덕의 베풂 또한 함께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세상을 오래 따뜻하게 지탱해 온 힘은 거대한 권력이나 화려한 명성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해 밥 한 끼를 정성껏 차리고, 힘든 사람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며, 좋은 인연을 오래 품으려는 마음이었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이름을 때로는 크게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체를 실제로 지탱해 온 것은 바로 그러한 자비와 나눔의 마음이었다.


오늘 정영숙 박사님을 보며 나는 단순히 한 분의 음식 장인을 만났다는 생각보다, 오래된 한국 여성 문화 속에 이어져 내려온 따뜻한 돌봄과 베풂의 정신을 다시 만난 듯한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달라져도 사람의 향기는 결국 마음에서 나온다.

진정한 품격 역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 주었는가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나 같은 우부(愚夫)도 깨우치게 해 준 분이었다.

오래도록 삶의 귀감(龜鑑)으로 마음속에 새겨 두고 싶은 분이다.

                    

              2026년 5월 28일 / 해운 허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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