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제신문 편집국
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주>

< 제1부 :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1장. 교과서는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① 교과서는 사실의 집합인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배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과서에 적힌 내용을 자연스럽게 ‘사실’이라고 믿는다. 시험 문제의 정답이 교과서 안에 있고, 국가가 인정한 내용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과서는 오랫동안 ‘객관적 진실의 기록’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교과서는 과연 순수한 사실의 집합일까.
역사는 본래 무수한 사건과 기록, 증언과 해석이 뒤엉킨 거대한 기억의 숲이다.
교과서는 방대한 역사 가운데 일부만을 선택해 서술한다. 어떤 사건은 크게 다루고, 어떤 사건은 짧게 지나가며, 어떤 인물은 영웅으로 기억되고, 어떤 인물은 침묵 속에 묻힌다. 결국 교과서는 역사를 ‘모두 기록한 책’이 아니라, 국가와 시대가 선택한 기억을 정리한 책에 가깝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교과서를 읽으며 역사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선택된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교과서가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교과서는 언제나 일정한 시대정신과 정치적 가치, 그리고 사회적 합의 속에서 구성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의 멸망을 설명하는 서술을 보자.
오랫동안 교과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국제질서의 냉혹함을 중심으로 망국의 원인을 설명해 왔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종종 생략되는 질문이 존재한다. 대한제국 내부 권력은 왜 그렇게 쉽게 무너졌는가. 왜 재정은 사유화되었고, 왜 관직은 거래의 대상이 되었으며, 왜 국가 운영 시스템은 극도로 비효율적인 구조로 변해 갔는가. 교과서는 외부의 침략을 설명하지만, 내부의 붕괴 구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침묵해 왔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한국 근대사에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교과서는 국가 정체성과 연결된다. 프랑스의 교과서는 프랑스혁명을 자유와 시민의 승리로 설명하고, 미국의 교과서는 건국 정신과 민주주의 발전을 강조한다. 중국과 일본 역시 자신들의 국가 서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한다. 즉 교과서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국가가 미래 세대에게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은가를 보여주는 정치적 문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를 이해하려면 교과서만 읽어서는 부족하다.
교과서 밖의 기록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 『일본외교문서』 같은 1차 사료들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문 기록 속에는 교과서 서술과는 다른 분위기와 긴장감이 살아 있다. 때로는 교과서가 단 몇 줄로 지나간 사건이 실제 기록 속에서는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와 정치적 갈등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가장 위험한 태도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믿는 순간이다.
교과서를 절대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회에서는 질문이 사라진다. 질문이 사라지면 비판도 사라지고, 결국 기억은 권력의 방향대로 굳어진다. 역사는 원래 끊임없이 다시 읽혀야 하는 학문이다.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면 해석도 달라질 수 있고, 시대가 변하면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근대사는 더욱 그렇다.
근대는 오늘의 국가 정체성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 그래서 어떤 사건은 강조되고, 어떤 사건은 축소되며, 어떤 용어는 반복적으로 선택된다. ‘을사조약’인가 ‘을사늑약’인가, ‘명성황후’인가 ‘민비’인가 ‘왕비시해’인가 ‘왕비살해’인가 같은 명칭 논쟁조차 단순한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기억의 정치와 연결된다.
교과서는 사실의 집합인가.
결국 교과서는 완전한 진실의 책이 아니라, 한 시대가 선택한 역사 인식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진짜 중요한 것은 교과서를 무조건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교과서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 이면을 질문하는 태도이다. 왜 이 사건은 강조되었는가. 왜 어떤 기록은 빠져 있는가. 왜 특정한 용어만 반복되는가. 바로 그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비로소 역사는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탐구의 영역이 된다.
역사는 단지 과거를 배우는 학문이 아니다.
그렇다. 역사는 현재의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고 있는가를 묻는 작업이다. 그리고 교과서는 바로 그 기억이 어떻게 선택되고 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거울 가운데 하나이다.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