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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하는 소견에 의해서는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과 근심 및 그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 번민 등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그 속에 존재하는 이는 항상 고통 속에서 신음의 끈을 놓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싫어하는 소견에 의해서는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이 따라 붙을 수 없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청정하듯이 말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과 근심 및 그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 번민 등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 ‘아아, 즐겁다’라는 기쁨이 충만한 울림을 소리 높이 외칠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얽매임의 집착에 대하여 싫어하는 견해를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만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이라 하겠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 중생제도를 강조하면서 등장한 대승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 즉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타인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공동체적 정신을 표현한 말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 중생제도를 강조하면서 등장한 대승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 즉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타인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공동체적 정신을 표현한 말이다.

즉 보살이 위로는 자신을 위해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깨닫지 못한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담고 있음이리라. 이러한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보살의 원래적 표현인 보리살타의 의미로도 파악된다,

이때 보살이란 본래 보리살타를 줄인 말로서 보리살타는 인도의 옛말 보디삿트바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보디와 삿트바는 각각 깨달음과 중생을 의미하며, 따라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보살이 마땅히 해야 하는 자리이타행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은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 큰 수레에 탄 대승과 작은 수레에 탄 소승의 차이점 때문이다. 작은 수레에 탄 소승불교에서는 위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나 아래로 있는 중생 제도에는 소원(疏遠)하다.

그러나 대승은 피안의 길을 향해 혼자가 아닌 모든 이가 같이 타고 가는 큰 수레이기 때문에 위로는 보리를 구할 뿐만 아니라 아래로 중생을 인도함으로써 깨달음에까지 이른다. 자신을 위해 위로는 부처님의 법을 구하되 아래로는 중생제도를 위해 끊임없이 수레바퀴를 굴려야 한다는 말이다.

요컨대 진정한 깨달음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일치될 때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를 믿고 따르는 모든 불자들은 위로는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르침을 믿고 수행하며, 아래로는 우리 이웃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불도로 이끌어야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불도수행의 실천이라 할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사회 전체의 도덕적 정신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나의 삶은 ‘하화중생’을 위한 방법론의 하나일 뿐일 것이다.

중생들을 인도하는 방법은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고난과 도탄에 빠진 중생들에게 나아가야 할 때와 멈출 때를 알려주어야 할 것이며, 마음 아픈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법음이라 할 수 있겠다.

즉, 나의 삶 자체가 봉사의 연속인 것도 이 삶의 굴레속에 있음이리라. 수행하기 위해서 서각도하고 수석화도 만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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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1-11-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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