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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1일은 올해로 93주년을 맞이하는 3.1절이다. 93년 전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던 독립만세운동은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염원과 일제의 탄압에 항거한 전 국민의 외침이었다.

부산에서 주목할 만한 3?1독립만세운동은 ‘동래’와 ‘구포’에서 이루어졌다. 이 중 동래 3.1만세운동은 부산경남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어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1919년 동래고등보통학교(지금의 동래고등학교)는 졸업반인 4학년생 엄진영을 비롯한 2, 3학년생들을 비밀리에 모아 전 학생이 총궐기할 것을 결의하였고 학생들의 시위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때인 3월 2일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곽상훈이 학생 대표로서 동래로 내려와 선언문과 격문을 전달하였다.

이때 군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이것을 모두 창호지에 베낀 후, 가위로 가늘게 잘라 노를 꼬아, 당시 축구화로 사용하였던 미투리의 끈을 만들어 신에 꿰어 가지고 내려 왔다고 한다.

곽상훈은 교사 이환을 만나 의거를 의논하고 상경하였다. 이환, 김병규 교사의 지원으로 사기가 고조된 학생들은 거사일을 동래장날인 3월13일 오후 2시로 잡고 독립선언서 500장과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2개의 기치와 수백 장의 태극기 그리고 “오왕독살(吾王毒殺 : 우리 왕이 독살당했다)”이라는 수백 장의 삐라를 준비하였다.

이와 같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동래고보 주동학생들은 동래장날인 13일 약속된 오후 2시가 가까워 오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동네 부인네들도 몰래 전달받은 태극기를 감추어 동래군청 앞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약속된 2시를 기해 엄진영이 군청 앞 망미루(望美樓) 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주위에 모였던 200여명의 학생들과 부인네들을 비롯한 장꾼들이 일제히 호응하였고 시장은 삽시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가득찼다.

이때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던 일경들도 극도로 당황하였고 그 중 한국인 경찰 1명과 헌병보조원 1명이 갑자기 모자와 제복을 벗어버리고 속옷차림으로 군중에 호응하여 감격에 넘친 채 만세를 불렀다.

참으로 민족정기가 분출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일본경찰들은 시위군중과 학생들을 향해 발포를 하면서 폭압적인 진압에 나서 주동학생들이 모두 검거되었다.

한편 시위에 참가하였던 학생들이 검거된 뒤 그 다음 장날인 3월 18일에는 일반군중들이 동래경찰서에 달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를 볼 때 당시 동래고보생들의 시위가 얼마나 동래 지역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학생들이 갇혀 있는 동안 동래사람 모두가 일체가 되어 사식을 넣어 주었던 동족애는 역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이어 3?18범어사 명정학교, 3?29구포장터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등 부산 경남지역 3?1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오는 3월 1일에는 국민모두가 가슴과 가정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93년 전 그날 학생과 시민들이 하나 되어 고창했던 “대한독립만세”를 역사왜곡을 일삼으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 일본 땅에서도 들릴 수 있을 만큼 목청껏 외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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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0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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