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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10월의 독립운동가로 북한강을 누빈 양평의병장 권득수 선생(1877. 10. 4 ~ 1907. 9. 2)을 선정했다.

선생은 1873년(고종 10년)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서 출생한 뒤, 파주군 적성에서 성장했으며 본관은 안동, 자를 성근(成根)이라 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기화로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그 동안 감추고 있던 대한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으며 그 뒤 일제는 1904년에 러일전쟁을 도발함으로써 대한침략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1월에 망국조약인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을사조약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으며 특히 광무황제 퇴위와 군대 강제해산은 우리 민족의 대일 적개심은 물론 항일기운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돼 전 민족이 대일전에 동참하게 되는 의병전쟁으로 승화되었다.

나라의 운명이 이처럼 스러져가던 참담한 상황을 그 누구보다 더 개탄해마지 않던 선생은 망국이 현실로 다가오던 을사 늑결 후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뒤 거사를 위해 적지(適地)로 판단한 양평으로 내려갔다.

이후 선생은 순국할 때까지 양평을 주 근거지로 삼아 경기도의 양주와 포천, 그리고 강원도의 홍천, 화천, 춘천 일대를 전전하면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도처에서 투쟁을 벌였다.

선생이 활동의 거점으로 삼은 양평은 시종일관 한말 의병전쟁의 중심에 놓여 있던 곳으로써 충청도와 강원도로 통하는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의 인후와도 같은 지리적 요충지였다.

더욱이 이곳은 많은 항일투사를 배출한 화서 이항로 학파의 중심무대로, 유인석이 이끈 제천의병의 연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던 십삼도창의군의 집결지가 양평(三山里)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러한 지리적 연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창의 후 선생은 양평의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양평을 비롯해 양주, 이천, 지평 등지를 전전하며 도처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용문사(龍門寺)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활동하던 선생은 대세를 타고 휘하 의병을 이끌고 한강 이북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양평군 양서면 문호리(文湖里)의 한강 나루터에서 도강을 시도하였지만, 선생의 도강을 차단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기병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문호리전투 후 병력과 무기 등 전력의 부족을 절감한 선생은 홍천과 춘천, 화천 등지에까지 활동지역을 넓혀 전력을 보강하였다. 선생은 다시 소장사를 가장하고 각지에 돌며 격문을 날리고 의병을 소모한 결과 170명의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이 거느린 의병은 한때 400여명에 이르는 대부대로 성장하게 되었다.

선생은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의병이 각각의 단위 부대별로 활동하게 되면 전력의 고립과 분산을 가져오게 된다는 점을 절감하고 양평 일대에서 활동하던 부대들과도 긴밀하게 연계하여 유기적인 항일전을 펴고자 하였다. 선생의 의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던 대표적 부대가 조인환(曺仁煥) 의병이었으며, 그밖에도 신창현(申昌鉉) 부대 등과도 상호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선생은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9중대와 수차에 걸쳐 접전을 벌이던 중 용문사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 선생의 나이 31세로, 1907년 9월 2일의 일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이러한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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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7-10-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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