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편집부국장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가 방한해 “AI 팩토리 시대”를 선언했다. 그는 한국을 아시아의 AI 제조 테스트베드로 삼겠다고 언급했지만, 이 발언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한국은 AI 시대의 주연으로 설 수 있을까, 아니면 또 한 번 조연으로 남을까.
AI 팩토리란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스스로 학습하며 지능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생산공장이다. GPU가 두뇌라면,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혈류에 해당한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HBM을 생산하며 반도체 메모리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AI의 두뇌 역할을 하는 GPU 설계와 인공지능 모델의 주도권은 미국 기업들이 쥐고 있다. 진정한 주도권은 칩 제조가 아니라 데이터와 알고리즘, 즉 지능을 지배하는 데서 나온다.
정부는 ‘한국판 AI 고속도로’라는 이름으로 지능형 정보망 구축에 10조 원 이상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인프라를 깐다고 해서 주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한국은 최고의 반도체 기술을 갖고 있지만, 엔비디아의 GPU와 미국 빅테크의 클라우드에 의존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도로’를 깔 수는 있지만, 그 위를 달릴 ‘국산 AI 자동차’가 부족한 상황이다.
이 간극을 만드는 요인은 세 가지다. 첫째, 개인정보 규제와 공공데이터의 폐쇄성이 여전히 산업적 활용을 가로막고 있다. 둘째, AI 인재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연간 3,000명 정도만 배출되지만, 실제 수요는 그 10배 이상이다. 셋째, 민관 협력이 선언에 그치고 실질적 시너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인프라를 깔아놓고 외국 기술을 빌려 쓰는 ‘하청형 AI 국가’로 머물 위험에 처해 있다.
AI 주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칩, 데이터, 인재라는 세 축이 단단히 서야 한다.
먼저 칩 주권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메모리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만, 설계 역량은 여전히 엔비디아와 AMD 등 외국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이 GPU 수출을 통제하면서 기술 패권을 무기화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설계 주권 확보는 단순한 산업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다.
두 번째는 데이터 주권이다. 데이터는 AI의 연료이지만, 한국의 공공데이터 개방률은 OECD 기준 53%에 불과하다. 규제와 폐쇄성 속에서 AI는 달릴 연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데이터 신탁제나 비식별화 기술을 적극 도입해 민감정보를 보호하면서도 산업적 활용을 넓혀야 한다.
세 번째는 인재 주권이다. 국내 AI 박사급 인력은 2,500명 수준으로 미국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AI 인재는 단순한 연구 인력이 아니라 국가 전략자산이다. 대학 중심의 양성 정책을 넘어, 정부가 주도하는 집중형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5년 내 1만 명의 핵심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AI 제조 강국’은 될지언정 ‘AI 설계 종속국’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단순히 AI 팩토리나 고속도로를 짓는 수준에서 벗어나, 그 위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지능 국가’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AI 시대의 경쟁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술을 갖춘 한국이 진정한 AI 강국으로 서기 위해서는, 이제 ‘공장’이 아니라 ‘지능’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지금 결심하지 않으면, 미래의 AI 경제에서 한국은 무대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남게 될 것이다.
“기술은 배운 자의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것이다.” – 앨런 튜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