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이정자대한민국에서 개인정보 유출은 여전히 민간 차원에서 발생한 사고일 뿐이다.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낸 기업은 물론 정보를 빼돌린 개인에 대한 형사 처벌 수위 또한 사실상 경범죄 수준이다.
이름, 이메일, 집주소, 심지어 현관 비밀번호가 포함된 개인정보 수천만 건을 빼돌려도 개인정보보호법이 정한 최고형은
징역 5년, 벌금 5000만 원 이하다. 명예훼손이 최고 징역 7년 이하인데 비해 오히려 처벌 수위가 더 낮다.
2011년 제정한 개인정보보호법이 데이터가 곧 국가안보가 된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탓이다.
쿠팡 3370만 고객 개인정보가 중국인 직원에 의해 중국으로 유출됐다는 의혹은 사실 여부를 떠나 현행 한국 법체계가 가진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쿠팡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미국 기업이다. 만약 유사한 사건이 미국에서 발생했다면 단순한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아니라 국가안보 사건(National Security Breach)으로 분류된다.
미국은 고객 데이터 베이스(DB), 내부 알고리즘, 구매패턴과 같은 데이터 자산 유출도 국가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위협하는 범죄로 보고 법무부 산하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Division)이 수사에 관여한다.
유출자와 유출 기업에 대한 처벌 수위 또한 높다. 미국은 1996년 경제 스파이법(EEA)을 제정해 외국 정부·기업을 위한 기술·데이터를 빼돌린 행위에 대해 최대 25년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정부는 고객 계정 약 3370만개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쿠팡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일 국무회의에서도 쿠팡을 직접 언급하며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도 현실화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관련 기관의 시선도 사상 초유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일으킨 쿠팡에 쏠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은 현재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려 쿠팡 사태 원인 규명에 나선 상태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는 9일 오전부터 서울 잠실 소재 쿠팡 본사를 압수수색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쿠팡 관련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청문회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국회 과학 기술 방송 통신위원회는 9일 제429회 전체 회의에서 쿠팡 청문회 계획서를 채택했다. 쿠팡 청문회는 오는 17일 오전 10시로 예정됐다.
최민희 과방위원장은 지난 현안 질의에도 충분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아 청문회 실시를 위한 계획서를 채택했다고 밝혔다.
이번 쿠팡 사태로 국민 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보이스피싱·스미싱 피해 우려 때문이다. 쿠팡 측이 유출됐다고 밝힌 개인정보 항목은 이름, 전화번호, 주소, 일부 주문 내역 등으로, 모두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 이에 시중은행들은 고객들에게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인한 2차 피해에 주의해야 한다는 안내문까지 발송했다.
또한 국내 이커머스 1위인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쿠팡의 미국 본사를 상대로 소비자 집단소송이 추진된다. 국내 로펌인 법무법인 대륜(대표 김국일)이 미국 현지에 설립한 로펌 SJKP는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원월드트레이드센터(1WTC)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팡의 모회사인 쿠팡 아이엔씨(Inc.)를 상대로 뉴욕 연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쿠팡 아이엔씨는 쿠팡 한국법인의 지분 100%를 보유한 모기업이다.
나스닥 상장사인 쿠팡의 고객정보 유출은 연방거래위원회(FTC)의 제재를 받을 수 있고, 피해자들의 무더기 손해배상 소송을 감수해야 한다. 미국에서 3600만명 고객 정보 유출 사고가 벌어졌다면 유출자는 평생 옥살이를, 기업은 존속을 걱정해야 할 중범죄라는 얘기다.
법무법인 대륜 김국일 경영대표는 쿠팡 아이엔씨는 미국에 설립돼 있고, 이사회 경영진이 미국에서 리스크 관리와 거버넌스를 총괄해 왔다며 보안 투자ㆍ내부통제 등에 대한 최종 책임은 미국 본사 이사회와 최고 경영진에게 있는 만큼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있어 배상 규모 자체가 다르다며 실제로 미국 에퀴팩스(Equifax)는 3000만명의 정보를 유출해 합의금으로 7억 달러를 냈는데, 이런 선례들을 근거로 쿠팡 측에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특히 이번 소송에는 한국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쿠팡 서비스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 미국 거주자와 미국 시민들도 원고로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SJKP 측은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미국 집단소송 참여자를 모집할 방침이다.
국경 밖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미국 본사의 책임이 차단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게 최근 흐름이라며 특히 쿠팡 사건은 미국 상장사로서의 거버넌스ㆍESGㆍ데이터 보호 책임이 결합 되어 있어 새로운 선례를 만들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대륜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이미 국내에서 집단 손해배상 소송에 참가할 피해자 모집에 나섰다. 미국 현지에서 집단소송이 본격화되면 SJKP와 협력해 공동 대응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