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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옮기면 낙서와 같은 의미를 가진 그래피티(graffiti)는 1960년대 뉴욕의 흑인 젊은이들이 건물외벽이나 지하철 등에서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이나 구호를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도심이 뒷골목 문화로 출발한 그래피티는 80년대를 거치면서 유럽과 미국의 대중들에게 친숙한 새로운 거리예술 형식으로, 나아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장르로 발전하였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출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나 최근 영국 출신 뱅크시(Banksy)의 작업들이 소개되기도 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장르로서 그래피티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아직은 낮은 편이다.
부산 청년문화수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그래피티 부산 2012는 한국 그래피티의 자발적 힘을 토대로 새로운 문화적 조류를 앞서 받아들이는 부산문화의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잘 보여주는 새로운 공공예술의 사례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그래피티 작업은 압구정, 홍대 앞과 더불어 부산의 온천천을 주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젊은 작가들이 만들어온 온천천 그래피티 구역은 2010년 하천재개발 공사로 인해 거의 대부분 지워졌고 많은 작가들이 부산을 떠났다. 그래피티 부산 2012 프로젝트는 한국 그래피티 역사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던 부산의 전통, 그리고 그래피티의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의미를 다시 고민하고 실천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특히 그래피티 부산 2012는 부산지역에서 10여 년 동안 그래피티 관련 프로젝트를 꾸준하게 진행해 온 대안문화행동 재미난복수(독립문화공간 아지트)의 독립문화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협력하고 있다. 세계적인 독일 그래피티 작가 ECB의 부산 방문은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가능했고, 대안문화행동 재미난복수(독립문화공간 아지트)의 운영자로도 활동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그래피티 작가 KAY2도 아티스트로 참여했다. 디테일이 강한 구상작업을 통해 작품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던지고 사고를 유도하는 이들 작가의 작품은 현대화된 대도시와 화려한 해변, 전통 어촌의 모습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광안리 해변에서 지역의 특징을 제거하는 수많은 프랜차이즈 카페 사이에서 그래피티 작업이 가진 위트, 메시지, 압도적인 스케일의 힘을 동시에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9월로 예상하고 있는 광안리 방파제 작업도 눈 여겨 볼만하다. JNJ CREW, JUNK HOUSE, 양자주, SIXCOIN 등 작가들 각자의 특징이 강하고 완성도 높은 작업으로 명실상부하게 한국의 그래피티를 상징하는 작가들이며, JIAL1은 부산 온천천 그래피티 구역을 만든 장본인이다. 이러한 작가들의 개성 넘치는 작업이 회색 시멘트 구조물로만 보여 지던 방파제와 결합하는 것은 단순히 페인팅이 진행된다는 것 이상의 상징성을 내포한다. 부산광역시, 부산문화재단, 수영구청 등의 공관 및 기관에서 아름다운 불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그래피티를 공공성의 영역에서 주시한다는 것이며, 참여 작가들은 공간 해석을 근거로 작품이 지역에 밀착되는 방법을 생활처럼 일상적으로 실험해 온 프로페셔널이다. 또한 이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광안리 방파제는 그래피티 작업이 가능한 지역으로 작가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거대한 캔버스로의 전환점을 맞이할 것이다.
새로운 문화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지루할 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고 적잖은 시도들이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한국의 그래피티도 1990년대 중반 태동하여 20여 년의 짧은 역사 안에서 많은 고비를 넘겨 왔다. 최근 새로운 그래피티 작가군의 등장이 주춤하고 있고 기술적인 성장에 어울리는 철학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위기는 위기를 넘어서려는 실천적 의지만 있다면 위기에 대한 해법을 찾고 동시에 문화가 성장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부산청년문화수도 프로젝트 중 하나로 준비되고 있는 이번 ‘그래피티 부산 2012’는 우리나라 그래피티의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의미를 다시 성찰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독일의 ECB(커미셔녀 Martin Schulz), 서울의 JNJ CREW, JUNK HOUSE, 양자주, SIXCOIN, 그리고 부산의 KAY2(구헌주)와 JIAL1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