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훈 칼럼니스트
홍철훈 칼럼니스트1,200년 전, 장보고(張保皐)의 청해진(현 완도)은 신라의 끝이 아니었다. 세계로 열린 첫 번째 문이었다. 그가 청해진에서 ‘닻을 올린 것’은 그저 신라의 물건을 당나라에 팔려는 단순한 상혼(商魂)에서가 아니었다. 육지에 갇힌 신라를 벗어나 ‘바다’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창’을 낸 한반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문명적 전환’이었다.
주지하듯, 신라는 ‘육지 중심’의 지배체제였다. 정치ㆍ문화적 배경도 대륙(중국) 중심이었다. 삼면이 바다면서도 ‘바다 종사(從事)’는 천시했다. 그런 나라에서 골품제(骨品制)’로 중앙진출이 막혔을 ‘해도인(海島人)’ 장보고로선 그 ‘바다’가 유일한 ‘탈출구’요, ‘기회 창출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권력’의 먼 외각 청해진에서 그는 무엇을 꿈꿨을까? 마치 오늘날 ‘블루오션(Blue Ocean)의 개념’을 상상한 건 아니었을까? 즉, 바다(해양)를 ‘경쟁 없는 새 시장’, ‘모험과 독창적 아이디어로 넘친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으로서다.
장보고가 ‘바다에 설계했던 이정표(里程標)’를 따라가 보면 실로 그런 것 같다. 처음 ‘청해진에 거점’을 확보한 후, ‘군항 건설’→‘해적퇴치’→‘신라인 구출ㆍ안전 항로 확보’→‘해상무역성행’ 그리고 마침내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를 건설’한 로드맵으로 이어져서다. 실로 당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길이요, 위대한 길’이었다.
장보고의 ‘위업(偉業)’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특출함은 이미 바다 거점을 ‘청해진’으로 정한 안목(眼目)에서 드러났다. 그가 어떤 시각에서 바다를 대했는지 알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이다. 청해진은 당(唐)나라-신라-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지도의 중심축이고 삼각 항로의 정중앙에 위치해 ‘국제적 해상 물류 허브(hub)’로서 최적의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었다.
동시에 ‘해적퇴치의 군항지(軍港地)’로서도 천혜의 요새였다. 다도(265개 섬)로 둘러싸여 항 내는 조류(潮流)가 완만하고 해류 영향도 적으며, 천해(10~30m)라서 외해 항해용인 해적선 침입을 막기에도 철옹성이었다. 또 800년 뒤 이순신 장군이 그랬던 것처럼, ‘해전(海戰)’에 계절풍과 조류변화, 그리고 복잡한 주변 지형지물을 잘 활용했을 것이다. 이는 장보고가 바다의 악조건 속에서 단기간에 해적을 소탕해 ‘해상 물류의 안전 항로’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백전백승의 해전신화’가 이미 1,200년 전에 장보고로부터 시작됐음을 암시하는 대목일 것이다.
AI생성 이미지(제미나이 제작)더욱 주목할 건, 당나라 군부에서 이미 큰 신임을 얻어 장수로 정착한 그가 명리(名利)를 다 버리고 귀국해, 해적을 퇴치함으로써 그들의 노예로 중국 각지에 팔려나가던 숱한 신라인을 구출한 점이다. 이들은 대다수 신라 골품제의 ‘벽에 갇힌’ 평민이나 천민이었다. 헌데 나라가 못한 일을 장보고가 해주었으니 그들의 감사와 신뢰가 어떠했겠는가! 당대 가장 뛰어난 사가(史家)로 알려진 당(唐)시인 두목(杜牧)이 장보고를 두고 ‘성인(聖人)의 심성을 가졌다.’*1고 과연 칭송한 할 만한 일이었다.
더욱이 장보고는 그들을 본국에 송환하지 않고 중국 산둥성(현, 靑島) ‘신라방(新羅坊)’에 거주토록 했다. ‘인간애’로 시작됐을 이들과의 강력한 유대감이 신라방에 점차 구축되었을 것이고, 마침내 신라방은 장보고의 ‘바다 물류 확대를 위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또 이들은 장차 신라방이 ‘민간 주도 국제무역(육ㆍ해상) 네트워크’로 성장케 하는 귀중한 인적자원이 되었다. 요컨대, 나라가 외면한 백성들을 ‘해상 물류의 전문 인력’으로 재탄생시킨 셈이다. 뛰어난 용인술이 아니겠는가!
이제 장보고가 해적퇴치로 ‘동아시아의 안전 항해’를 확보한 것은 곧 3국에 대한 ‘무역 안전 항로’가 구축됐음을 뜻하며 이는 그가 당나라와 일본으로부터 ‘해상무역 신뢰 자본’을 축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야흐로 청해진은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허브’가 되었고, 당시 장보고가 당ㆍ일에 미친 치적을 상세히 기록한 일본 승려 엔닌*2의 지적처럼 장보고는 명실공히 ‘해상의 주권자’가 되었다.
한편, 장보고가 당에 건립한 ‘법화원(法華院)’도 눈여겨 볼만하다. 30여 명 이상의 승려가 머물렀다 하니 그 규모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승려도 아닌 그가 이를 건립했을까? 이는 필시 본국을 떠나 잊혀 가는 신라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타국에서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가히 ‘성인’다운 긍휼(矜恤)함의 발로다. 그러나 그를 ‘사업가’로 보면, 모두 미래를 내다본 고도의 인적ㆍ자본투자였다. 고국을 벗어나 노예로 전락했던 이들에게 ‘직업’과 ‘종교적 안식처’를 제공해 마침내 신라방과 청해진을 잇는 ‘동아시아 무역상권의 육ㆍ해상벨트’로 발전시킨 비범한 기업가가 아니었겠는가!
장보고는 ‘바다 천시 시각’의 신라 사가(史家) 붓에 오른 ‘역신(逆臣)’이 아니었다. 신라조정이 버려둔 ‘노예 신라인’을 구한 ‘성인(聖人)’이었고, 해적을 소멸한 유능한 ‘해전 전략가이자 제독(提督)’이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바다를 경제 공간으로 인식한 실업가’였다. 그가 발행했을 ‘글로벌 신용화폐’로서의 ‘어음(魚音)’이 장차 동남아시아와 저 인도양까지 뻗어갔던 ‘거대 해상(海商)의 흔적’을 살펴보고, 장보고가 설계한 해상(海商) 프로토콜(protocol)이 ‘송ㆍ원ㆍ명’ 제국으로 이어지는 동양 해양사의 거대한 밑그림이 된 역사를 꺼내어 이 시대의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삼아보자. (3편에 계속)
*1두목(杜牧, 803~853): 서사(書史) 번천문집(樊川文集)을 쓴 唐 시인. 이 문집의 원본은 필자가 건강상 이유로 대부분 불태워 사후 조카 배연한(裵延翰)이 재수집한 것을 송대(宋代)에 정비하고, 이후 원, 명, 청을 거쳐 끊임없이 필사되고 간행된 ‘생명력이 긴 교본’이다. 여기서 두목은 장보고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하였다. 또 장보고 위업이 송ㆍ원ㆍ명으로 이어지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2엔닌(円仁, 794~864): 9세기 헤이안(平安) 시대(794년~1185년)에 활동한 연력사(延曆寺, 엔랴쿠지)의 일본 승려. 그가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그가 당나라에 9년간(838~847) 머무르며 귀국하기까지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그는 여행 기간, 소위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장보고의 치적을 여행기에 남겨 장보고에 대한 일본의 귀중한 사료로 알려져 있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