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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기고] 바다의 타임라인_330년 전 ‘안용복의 사료’ 다시 보기(1)
  • 기사등록 2026-04-28 10:42:48
  • 기사수정 2026-04-28 10:4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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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훈 칼럼니스트필자의 ‘바다의 타임라인(time line)’에 두 번째로 안용복(安龍福)(미상~미상)을 올린다. 안용복은 조선이 300년 넘게 버려둔「울릉도ㆍ독도」를 일본 ‘에도막부’의 심장부를 흔들어 마침내 조선영토로 편입시켰으나 모국에 돌아와선 ‘월경죄(越境罪)’의 칼날에 쓰러져 유배된 ‘죄인’이 되었다. 놀라운 건, 그 ‘죄인’ 안용복을 일본에선 ‘조선 대사(大使)’로 칭송했다. 첫 번째 주인공 ‘장보고’처럼, 어쩌면 이렇게 안팎으로 또 ‘딴판’일까? 여기선 그 연유를 살피고 330년 전 안용복을 새로 복원해 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숙종, 30권)은 안용복을 “국법 어긴 위험인물”이요, “외교적 골칫덩이”로 보았다. 실록에서 안용복의 첫 기록은 ‘범월(犯越)’이었다. ‘무허가 월경(越境)’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사칭(詐稱)’이었다. ‘감세관(監稅官)’이라 속였다는 것이다. 그래 사형이 선고되었다. 330년 뒤 대한민국에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될 ‘해양주권회복공로’는 저 뒷전에 있었다. 그나마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영토확정의 공로로 죽여선 안 된다”고 변호해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다.  


이렇게 안용복은 조선에선 ‘죄인’으로 낙점돼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헌데, 일본 사료를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영웅’으로 ‘성큼’ 다가와서다. 먼저,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일인에게 ‘납치’됐던 ‘1차도일(1693.3)’의 기록을 보자. 돗토리현(鳥取蕃)의 공식업무일지인 ‘죽도고(竹島考)’*1 최초 기록엔 안용복 일행을 ‘납치된 어부’, 비천한 ‘표류 어부’로 또는 ‘조선포민(朝鮮浦民)’이라 기록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인데 왜 너희가 오느냐”고 일본말로 강력히 따지자 일본관리가 일개 ‘어부’답지 않은 그의 기개에 깜짝 놀랐음이 드러난다. 또 행정 연표인 ‘인부연표(因府年表)’*2에는 안용복 일행의 ‘도착일정’과 ‘처우(식사제공 등)’를 이례적으로 상세히 기록했다. 사료 행간을 보면, 혹여 향후 ‘조ㆍ일 국경 분쟁’으로 비화해 상부 기관의 귀책사유가 될까 우려했던 점이 역력했다. 게다가 안용복이 ‘호키주(伯耆州)(현 돗토리현)’ 태수 면전에서 ‘납치의 부당성’과 ‘조선 해계(海界)’에 대해 유창한 일본어와 정연한 논리로 강력히 항의했기에 실로 ‘범상치 않은 인물’로 비쳤다.  


실로 놀라운 건, 일개 ‘어부’의 항의일 뿐인데, 오키 도주(島主)→호키주 영주→‘에도막부(江戶幕府)’에까지 보고돼 마침내 일본 실질 권력자 ‘관백(關白)(도쿠가와 쓰나요시, 德川綱吉)’으로부터 “울릉도에 일본인 출입을 금한다(竹島渡海禁止).”라는 내용의 ‘서계(書契)’*3를 받고 귀국길에 올랐단 점이다. 일본에서의 안용복을 살펴볼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한편, 귀국 도중, 대마도주(소우 요시자네, 宗義眞)에게 ‘서계’를 탈취당한다(일본 사료 ‘이표기(吏標記)’)*4. 안용복은 귀국해 동래부사를 통해 그간 정황에 대한 장계를 올렸으나 조정(朝廷)은 사실상 ‘서계’는 무시하고, 대마도주의 농간에 ‘사대교린(事大交隣)’의 난색만 표하다 ‘조선 해계’ 건은 수면 아래로 잠기고 만다. 


3년 뒤 이번엔 안용복의 ‘2차도일(1696.5)’ 기록을 보자. 안용복이 다시 ‘호키주’에 도착했을 때 이번엔 “울릉자산양도감세관(鬱陵子山兩島監稅官)”이란 가짜 직함에다 ‘화려한 관복’을 입고 있었다. 일본 사료 ‘원록구병자년조선취차일기(元祿九丙子年朝鮮取次日記)’*5에는 안용복을 ‘조선국 대사(大使)’에 준하는 예우로 대했으며, 의상(관모ㆍ도포ㆍ허리 옥대 등), 감세관 표지의 ‘배 깃발’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이 사료는, ‘죽도고(竹島考)’, ‘인부연표(因府年表)’와 함께 소위 안용복 관련 ‘일본 3개 사료’ 중 하나로서 이 중에서도 안용복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료로 알려져 있다. 또 모두 ‘에도 막부(江戶 幕府)에 보고용’이어서 내용의 신뢰성이 높고 정황 기록이 상세한 게 특징이다. 역설적인 건, 이들 사료(史料)가 오늘날엔, 당시 안용복이 ‘주권의 정당성’을 증명했던 가장 강력한 일본 ‘자백의 서문(序文)’이 되었단 점이다.  


AI생성 이미지주목할 건, ‘2차도일’시에는 안용복에 대한 ‘입체적’ 기록이 많았다. 예컨대, “당당하고 위엄있다(威儀堂堂)”, “다변에 지략 있고(多辯而有智略)”, “화려한 복색에 기개가 높다(服色華麗 氣槪高仰)” 등이었다(취차도, 取次圖*6). 그의 ‘차림새와 기운’이 일본 영주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안용복은 결국 ‘에도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다시 확인’받고 귀국(1696.8)한다. 이듬해 1697년 2월, 대마도주(소우 요시자네, 宗義眞)가 막부 명령을 조선에 공식 전달해 ‘조선 해계(海界)’ 문제는 종지부를 찍는다.  


그런데 조선은 왜 안용복에게 ‘죽음’을 선고했나? ‘월경죄’, ‘사칭죄’가 「영토확정의 공로」보다 더 중했었나? 아닐 것이다. 안용복이 ‘천민’이라서였을 것이다. 사노비(私奴婢)에, 일개 수군(水軍) 노 젓는 능로군(能櫓軍) 출신 어부 주제에 감히 양반 관리를 넘어 영토문제를 해결했다는 자괴감, 당시 성리학적 사대부로서는 ‘칭송’보다 ‘은닉(隱匿)’하고 싶은 ‘수치’였을 것이다. 더 근본적인 건, 신라ㆍ고려로부터 전수한 ‘바다 천시의 국시(國是)’ 탓일 것이다. 결국, 안용복의 ‘유배’는 나라가 못한 영토수호를 ‘개인’이 해냈음에도 처벌한 또 하나 ‘바다 천시’의 전형(典型)이 되고 말았다.  


숙종실록은 냉정했다. 1697년 3월, 안용복을 유배한다는 판결을 끝으로 그는 공식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의 가족, 생몰 연도도 알 수 없다. 실로 ‘천인의 말년’은 사관의 기록대상이 아니었다. 조선은 주권을 지킨 백성을 유배 보냄으로써 ‘자신의 무능’을 유배시켰다. 한반도 국난 때마다 보는 수치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가 유배되고 20년도 안 돼 세계가 공인한 청나라의 해상지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1717)’가 ‘울릉도ㆍ독도’를 명백히 조선영토로 표기해 안용복에 대한 청(淸)의 ‘침묵의 증거’를 대변했다. 이제 짧고 굵었던 ‘진짜 안용복’을 ‘바다의 눈’으로 복원해 보자(2편에 계속). 

 

*1죽도고(竹島考): 돗토리번(鳥取蕃)의 공식기록으로서, 돗토리번은 당시 호키주(佰耆州)와 인바주(因幡州)를 다스리던 동해 남동 연안쪽 지방 정부다.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에 관한 역사, 이 기록은 막부(幕府)의 명을 받아 호키주의 유력자인 일본의 유학자 ‘무라카와 겐에몬(村川 源右衛門)’이 정리한 기록으로 안용복 일행의 도래 경위, 에도막부와 주고받은 보고서 등을 정리한 사료다.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는 강원도 소속”이라고 발언한 초기기록이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건, 1차도일 당시 안용복이 호패를 보여 그의 신상을 소개해 그 기록이 남아있는 점에서다. 즉, 성명: 안용복(安龍福), 거주지: 조선국 경상도 동래부 좌천리(佐川里) 제14통 제3호, 신분: 부산포 오작직(塢作職)/능로군(能櫓軍), 나이: 36세(1693년 기준), 신체적 특징: 키가 7척, 얼굴이 검고 수염이 적음. 따라서 ‘생년 미상’으로 알려져 왔던 안용복은 당시 1693년 기준 36세(세는 나이)이므로 1658년 무술 생 개띠임.  

*2인부연표(因府年表): 돗토리번(鳥取藩)의 역사를 일별로 기록한 공식 편년체 연표. 현립도서관, 박물관에 소장. 안용복 일행의 사건 시간대를 증명하는 결정적 자료임. 

*3서계(書契): 1693년(원록 6년) 안용복이 납치(1차도일)됐을 당시 에도막부가 안용복의 항의에 대해 내린 조치가 기록된 서찰. “죽도는 조선과 가깝고 일본과는 멀어 조선의 영토임이 분명하니 이후 일본인의 도해를 금지한다.”는 취지가 담겼음. 그러나 귀국 도중 대마도주(宗義眞)에게 탈취당해 그 원본이 사라짐. 

*4이표기(吏標記): 대마도(쓰시마) 측 안용복 기록. 안용복이 막부로부터 받은 서찰을 대마도주(宗義眞)가 어떻게 가로챘는지, 또 조선조정과 어떤 ‘기망외교’를 펼쳤는지 ‘정황’이 담겨 있다.  

*5원록구병자년조선취차일기(元祿九丙子年朝鮮取次日記): 1696년(元祿 9년) 안용복 일행이 호키주(佰耆州)에 도착했을 때(2차도일)의 상세기록일기(심문조서). 돗토리번의 공문서(공식업무일지). 안용복 일행과의 대화 내용, 정황 등이 기록되었음. 에도막부 보고용이라 객관적이고 세밀히 채록함. 2005년 발견돼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일본 측 자백’으로 큰 화제가 되었음. 

*6취차도(取次圖): 안용복의 2차도일 때 보조자료. 일기형식의 기록과 당시 일인 관리가 봤던 안용복 일행의 모습, 가져온 물건 등을 그림으로 남겼다. 또 안용복의 관복, 조선팔도지도 등이 시각적으로 묘사돼 있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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