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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근의 역사 다시 읽기(6)] 왜 ‘군인항쟁’이 아닌가
  • 기사등록 2026-06-15 21:05:52
  • 기사수정 2026-06-15 2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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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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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2장. 임오군란은 정말 '군란'이었는가.

          ① 왜 '군인항쟁'이 아닌가.

                           ----------------------------------


역사는 같은 사건을 두고도 전혀 다른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 이름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과 기억의 방향을 결정한다. 어떤 사건은 ‘혁명’으로 기록되고, 어떤 사건은 ‘폭동’으로 남는다. 같은 무장 충돌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의거’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란’이 된다. 결국 역사 속 명칭은 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라, 권력이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자 기억을 통제하는 도구에 가깝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를 둘러싼 역사 서술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반복된다.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바로 1882년의 임오사건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스럽게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과연 이 사건은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군란’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그렇게 규정된 것일까.


‘군란’이라는 단어는 이미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군란은 말 그대로 군인들이 질서를 파괴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국가 질서를 흔든 폭력성과 부정성이 포함된다. 반면 ‘항쟁’이라는 표현은 부당한 권력이나 구조에 맞선 집단적 저항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어떤 명칭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건의 도덕적 위치와 역사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실제로 임오사건 배경을 보면 군사 반란으로 보기 어려운 요소들이 적지 않다. 

당시 구식 군인들은 오랫동안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고, 지급된 군량미조차 모래와 겨가 섞인 부실한 상태였다. 『고종실록』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가 군인들에게 지급한 군량 문제로 군사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¹ 당시 군인들의 불만은 단순한 급료 체불 문제가 아니라, 국가 운영 구조 속에서 자신들이 차별받고 있다는 인식과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별기군 창설 이후 나타난 차별은 구식 군인들의 반발을 더욱 증폭시켰다. 

일본식 군사 훈련을 받는 신식 군대는 우대받았지만, 기존 군인들은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재정난 속에서도 신식 군제 개편에 집중하였고, 기존 군영은 급속히 약화되고 있었다. 결국 임오사건은 단순한 우발적 폭동이 아니라, 국가 개혁 과정에서 배제된 군인 집단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라는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역사 서술은 오랫동안 이 사건을 ‘군란’으로 규정해 왔다. 

왜일까. 그것은 국가 권력과 지배 질서의 시선에서 사건이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조정 입장에서 무장한 군인들의 봉기는 어디까지나 국가 질서를 위협한 반란이었다. 따라서 사건은 ‘난(亂)’으로 규정되었고, 이후 교과서와 역사 서술 역시 이러한 틀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 속에서 비슷한 사건이라도 정치적 결과에 따라 전혀 다른 이름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이다. 


1882년 임오군인항쟁 이미지

1960년 4·19는 ‘혁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1980년 광주의 경우 오랫동안 ‘광주사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태’라는 표현은 국가 폭력과 시민 저항의 본질을 흐리는 효과를 가졌다.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명칭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다. 이름이 바뀌자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 역시 달라졌다.


동학농민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는 ‘동학난’ 혹은 ‘동비의 난’으로 불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표현이 공식화되었다. 이는 단순한 단어 교체가 아니다. 과거에는 국가 질서를 흔든 반란으로 규정되었던 사건이, 이후에는 민중의 저항과 근대 변혁 운동으로 재평가되었음을 뜻한다. 즉 명칭 변화는 곧 역사 인식의 변화였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역사 속 명칭은 결코 고정된 진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름은 권력관계 속에서 선택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객관적 사실처럼 굳어진다. 결국 사람들은 이름을 통해 사건을 기억하게 된다. ‘군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질서와 폭동이 먼저 떠오르고, ‘항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저항과 억압의 구조가 떠오른다. 이름 하나가 역사적 감정을 결정하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임오사건을 무조건 ‘군인항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 명칭을 절대적 진실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다. 

오히려 왜 특정 시대와 권력이 그 사건을 ‘군란’으로 규정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역사 연구의 핵심은 단지 사건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어떻게 해석되고 기억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오사건 이후 조선 정부는 청군의 개입 속에서 권력 구조를 재정비하였다. 대원군은 청나라로 압송되었고, 민씨 세력은 다시 권력을 회복하였다. 조선 조정 입장에서 임오사건은 체제를 위협한 폭력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군란’이라는 명칭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체제 수호의 논리가 반영된 정치적 언어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역시 조선 관련 사건의 명칭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일본 외교문서와 언론은 조선 내부의 혼란과 폭력성을 강조하며 조선 정부의 무능함을 부각시켰다. 이는 이후 일본의 조선 개입과 내정 간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결국 사건의 이름은 단순한 역사 용어가 아니라 국제정치와 권력 논리 속에서도 활용되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는 사건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이름을 선택하고, 그 이름 속에 특정한 해석을 남긴다. 그래서 어떤 사건을 어떻게 부르는가는 단순한 표현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방향을 결정하는 문제다. 교과서는 오랫동안 ‘임오군란’이라는 이름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름 자체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왜 ‘군란’이 되었는가. 누가 그렇게 불렀는가. 그리고 그 이름 속에서 무엇이 지워졌는가.


역사는 과거의 사실만이 아니라, 과거를 설명하는 언어의 구조까지 함께 살펴볼 때 비로소 입체적으로 보인다. 이름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선택한 기억이며, 때로는 승자가 남긴 해석이다. 그래서 역사 연구는 사건을 읽는 작업인 동시에, 사건에 붙여진 이름을 의심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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