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제신문 편집국
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
<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2장. 임오군란은 정말 '군란'이었는가.
③ 프레임으로 쓰인 역사
----------------------------------
역사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역사는 사건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통해 기억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시대에는 ‘혁명’이 되고, 어떤 시대에는 ‘폭동’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의거’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란’이 된다. 결국 역사 속 명칭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게 만드는 프레임이며, 그 프레임 뒤에는 언제나 권력의 시선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임오군란’이라는 프레임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1882년 사건을 자연스럽게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쯤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이 사건은 ‘군란’이 되었는가. 왜 ‘군인항쟁’이나 ‘군인봉기’가 아니라 ‘군란’으로 굳어졌는가.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군란’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미 사건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난(亂)’은 국가 질서를 어지럽힌 반란과 혼란을 의미한다. 즉 사건의 원인과 구조보다 “질서를 파괴한 폭력”이라는 인상이 먼저 강조된다. 사람들은 ‘군란’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무질서와 폭동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임오사건의 배경은 단순한 폭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많다.
당시 구식 군인들은 오랫동안 급료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고, 지급된 군량미조차 모래와 겨가 섞인 부실한 상태였다. 여기에 일본식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대한 특혜와 기존 군영에 대한 차별이 겹치면서 군인들의 불만은 극도로 커지고 있었다. 결국 사건은 단순한 폭력 난동이라기보다 국가 개혁 과정 속에서 배제되고 차별받았던 집단의 분노와 저항이라는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 입장에서 무장 군인들의 집단행동은 어디까지나 국가 질서를 위협한 반란이었다. 따라서 사건은 자연스럽게 ‘군란’으로 규정되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드러난다. 권력은 사건을 단순히 설명하지 않는다. 권력은 사건을 해석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이름 속에 남는다.
「역사는 해석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 」 그림 이미지
이러한 현상은 비단 조선만의 일이 아니었다.
중국 청나라 말기의 의화단 사건 역시 비슷한 구조를 보여준다. 당시 청 조정과 서구 열강은 의화단 세력을 “폭민” 혹은 “난민”으로 규정하였다. 실제로 서구 언론은 이들을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폭도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의화단 운동은 외세 침략과 경제적 붕괴 속에서 나타난 민중 저항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물론 폭력성과 종교적 광신성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권력이 어떤 측면을 강조했는가이다. 열강과 청 조정은 질서 파괴와 폭력성만을 부각시켰고, 결과적으로 의화단은 오랫동안 단순한 폭도 집단처럼 기억되었다.
1857년 인도의 세포이 항쟁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영국은 이 사건을 ‘세포이 반란(Sepoy Mutiny)’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Mutiny’는 군대 내부의 반란을 의미한다. 즉 영국은 사건을 일부 군인의 불복종 정도로 축소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에서는 이를 ‘인도 독립전쟁’ 혹은 ‘제1차 독립운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단순한 군인 반란이 아니라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배와 경제 수탈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사건 자체는 동일하지만, 제국의 시선에서는 ‘반란’이었고 피지배 민족의 시선에서는 ‘독립운동’이었던 셈이다.
아일랜드 독립운동 역시 비슷하다.
1916년 더블린에서 발생한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 당시 영국 정부는 참가자들을 국가 질서를 흔드는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초기 영국 언론 역시 이들을 무모한 폭도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일랜드 사회에서는 이 사건이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결국 과거의 ‘반란군’은 훗날 ‘독립 영웅’으로 바뀌었다. 이름이 달라지자 기억의 방향도 달라진 것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권력도 비슷한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무장 행동은 ‘혁명’으로 규정했지만, 반대 세력의 저항은 ‘반혁명 폭동’으로 불렀다. 같은 무장 충돌이라도 누가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정의와 질서, 혁명과 폭동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결국 권력은 언제나 자신들의 폭력은 정당화하고 상대의 폭력은 범죄화하려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명칭의 힘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사건의 복잡한 구조보다 먼저 이름을 기억한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정의와 변화, 민중의 열망을 떠올린다. 반면 ‘폭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질서와 파괴를 먼저 연상한다. 즉 명칭은 사건을 바라보는 감정과 판단을 먼저 결정한다. 권력은 바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 속 지배 세력은 언제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름을 선택하려 했다.
실제로 로마 시대 이후 수많은 왕조와 국가들은 반대 세력을 ‘역도’, ‘난적’, ‘폭민’으로 규정해 왔다.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정치적 주장과 이유를 가진 집단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혼란 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자신들의 행동을 ‘개혁’, ‘혁명’, ‘정의로운 정벌’로 포장하였다.
결국 ‘군란’이라는 프레임 역시 단순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질서를 중심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권력의 시선이다. 만약 누군가가 같은 사건을 ‘항쟁’으로 부른다면 질문 자체가 달라진다. 왜 그들은 봉기했는가. 무엇이 그들을 거리로 몰아냈는가. 누가 배제되었고 누가 차별받았는가를 보기 시작한다. 반면 ‘군란’이라는 이름은 사건의 원인보다 질서 파괴와 폭력성을 먼저 바라보게 만든다.
즉 이름 하나가 질문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연구는 단지 사건을 나열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왜 특정한 이름이 선택되었는지를 묻는 작업에 가깝다. 누가 그렇게 불렀는가. 왜 다른 표현은 배제되었는가. 그리고 그 이름 속에서 무엇이 지워졌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역사는 흔히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는 승자가 붙인 이름 속에서 기억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깨닫게 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기억과 해석의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