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훈 칼럼니스트
홍철훈 칼럼니스트구국의 영웅이 필요했던 변방의 가난한 섬나라 영국과 생존을 위해 대양을 품어야 했던 천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절묘한 만남은 16세기 후반 영국을 재정적 파산 직전에서 구했다. 그가 세계 일주 중에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아 영국에 바친 재화는 당시 영국 1년 국가 총수입을 웃돌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외국부채를 다 청산하고, 최신식 전함건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으며 동인도 회사 설립에도 일부 쓰였다 하니 놀랄만하다. 그렇더라도 계급사회인 영국에서, ‘해적’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 건 의외였다. 실로 신분의 귀천을 가림없이 실력 있고 국가에 유익한 인재라면 누구든 귀족으로 품을 만큼 영국왕실의 ‘실용적 유연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 주목할 건, ‘골든 하인드호’ 선상에서 여왕의 기사 작위 수여식이다. 관례는 그녀가 직접 칼을 들고 드레이크 어깨를 치는 것인데, 현장에 배석한 프랑스 대사에게 대신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강국 스페인을 의식해, 기사 작위 수여가 영국과 무관하다는 ‘외교적 퇴로’를 열어 두었고,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에 대한 프랑스의 암묵적인 정치적 지지도 얻었으며, 동시에 스페인에 대항해 영국과 프랑스의 연대를 은근히 과시한 고도의 외교술이었다. 게다가 유럽 열강에 영국 대양항해의 쾌거를 알려 영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데도 기여했다. 실로 정치ㆍ외교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그렇더라도 스페인과 영국의 바다패권 다툼은 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영국의 흥망성쇠’가 걸렸던 두 개의 결정적인 해전을 살펴보자.
그 첫 해전은, 드레이크가 일약 영국 제독(부사령관)으로 임명돼 치러진 ‘카디스(Cadiz) 해전’이다. 1587년, 드레이크가 스페인 남단 군항(軍港)까지 비밀리 항진해 감행한 전설적인 ‘선제타격 기습전’이었다. 스페인 국왕(펠리페 2세)이 영국 침공을 위해 카디스 항에 수많은 전함과 물자를 집결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해 야밤에 카디스 항에 접근해서는, 당시의 해전 상식인 항구 밖으로 적을 유인해 공격하는 방식을 역이용하여, 스페인 요새 포 사정거리 내에 있음에도 항 내로 신속히 진입해 무방비 상태로 정박 중인 스페인 전함(30여 척)을 파괴ㆍ나포하고, 다량의 군수 보급품을 불태운 뒤 도주한 해전이었다. 실로 대승이었다! 해적 출신다운 ‘히트 앤드 런’ 전법이었다. 놀라운 건, 침공계획에 대한 여왕의 우려가 담긴 ‘공격 중지’ 메신저를 못 본 척하고 감행했다는 것이다. 실로 제독으로서의 ‘소신’과 ‘대담성’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이 통쾌한 승리 후 여왕에게 “스페인 왕의 수염을 불태웠습니다(Singeing the King of Spain’s beard)”라는 보고를 남겨 더욱 유명해졌다 한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영국 침공계획은 1년 이상 지연되어 영국으로선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번 셈이 되었다.
영국의 절체절명의 위기는 이듬해 1588년 여름에 닥쳐왔다. 당시 세계 바다의 왕자를 자처했던 스페인 ‘무적함대(Armada)’의 침공이었다. 프랑스 앞바다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반군(개신교 동맹)이 연합해 맞섰던 소위 ‘칼레(Calais) 해전’이다. 그해 8월, 마침내 전열을 정비한 스페인 함대(130여 척)가 프랑스 칼레항(영국 본토와 약 34km)에 출현해 단 3~4시간 만에 육군이 약한 영국 본토에 육전대(군인)를 상륙시키려 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영국은 멸망할 운명이었다.
바다의 타임라인_F. Drake, ‘구국 영웅’이 되다(2) 인포그래픽영국의 도버 하얀 절벽(White Cliffs of Dover) 위에서 육안으로도 어렴풋이 보일 만큼 근거리였다. 영국인들이 느꼈을 공포감이 어땠을까? 이 건곤일척의 순간, 초승달 대형으로 전선을 유지하며 칼레 앞바다에 정박한 스페인 함대를 향해, 실로 드레이크의 ‘신의 한 수’가 등장했다. 8월 8일 밤, 수 척의 낡은 배에 화약과 기름, 피치(pitch, 방화제)를 가득 싣고 불을 붙여 스페인 함대 한가운데로 돌진시켰다. 그 시각 도버해협은 강한 남서풍과 조류의 공조로 스페인 함대로 화선(火船)이 돌진하게 되어 대다수 함선을 순식간에 불태웠다. 마치 약 1,400년 전, 중국 삼국지 적벽대전(AD 208.11)에서 오(吳)의 주유가 위(魏)의 조조를 무찌를 때 썼던 그 화공(火攻)과 같았다. 스페인 함선은 우왕좌왕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주하다 영국 함포에 파괴되고 폭풍우에 침몰하여 겨우 1/3 정도만 스페인에 귀항했고, 3만여 병력 중 1만 명 이상이 수장되었다. 실로 대참패였다! 이 두 차례 해전의 패배로 스페인은 ‘바다의 왕자’ 자리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말았다. 드레이크는 실로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이 해전 이후 곧 우울한 말년을 맞는다. 칼레 해전 이듬해 1589년, 승리에 도취한 여왕의 지시에 영국의 거대함대를 이끌고 스페인 본토를 침공했다가 도리어 군인과 선원 1만 명 이상을 잃는 참담한 패전을 겪고 영국왕실에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끼쳐 제독 보직을 해임당하고 수년간 고향 데번주로 유배(정계 은퇴)된다.
그 후 1595년, 지루한 스페인과의 소모전으로 다시 금고가 비어버린 여왕의 ‘재정적 필요’와 이대로 잊힐 수 없다는 영웅의 마지막 ‘명예욕’이 맞물려 다시 여왕의 부름을 받고 바다로 나갔으나 이듬해 1596년 파나마 근처 해상에서 병사하게 된다. 한때 여왕이 하사했던 스카프를 두른 영웅의 시신은 납관(Lead Coffin)에 넣어져 그가 평생을 바친 카리브해 바다 한가운데로 수장(水葬)되었다. 실로 쓸쓸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인 가슴에 국민적ㆍ국가적 자신감의 DNA를 심어 놓았다. 그러니까 ‘바다 강국’ 스페인을 이겼다는 자긍심과 가난한 섬나라도 바다로 나가면 부국을 이룰 수 있다는 거대한 신념을 영국인 가슴 속에 문신처럼 새겨 놓은 거였다. 이제 그가 유언처럼 남긴, 17~19세기 영국이 ‘해지지 않는 나라’로 가는 이정표를 살펴보자. (3편에 계속)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