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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훈 칼럼니스트필자가 <바다의 타임라인> 시리즈를 집필하면서 의문이 있었다. ‘왜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만 머물렀을까?’ 였다. 이 ‘의문’을 좇으면서 ‘바다의 시각’으로 한반도를 재조명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장보고ㆍ안용복을 다시 살펴보고, 영국의 F. 드레이크와 네덜란드ㆍ일본의 국가 발전 과정을 바라보면서, 그 어떤 답을 얻은 듯했다. ‘국가가 바다를 바라보는 시각차’ 때문이라는 거였다.  


한반도는 조선 태종의 ‘공도(空島)정책(1416)’이 상징하듯이 바다는 무시되었다. 사실상 ‘바다를 경제 공간’으로 활용한 건 ‘장보고’로 끝난 셈이다. 대륙(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에 치중해, 대다수 문물 교류는 ‘육상’으로만 통했다. 다소 비약하자면 ‘중국’에 생사여탈을 맡긴 셈이 되었다. 지금 북한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었다. 바다는 천시의 대상이고, 왜침(倭侵)의 통로요, 이를 막는 ‘방어적 경계’일 뿐이었다. 그래 대륙 강대국에는 ‘예(禮)로 자존(自存)’하고 그 외 이웃 국가와는 우호ㆍ교류한다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이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사직(社稷)’을 중시한 ‘한반도 평화 보존’에 몰입하다 보니 점차 모든 북진정책이나 해양 진출은 사실상 사멸하게 된다. 


그 결과, 한반도라는 극히 ‘제한된 공간’ 속에서 이른바 ‘제로섬 리소스(Zero-sum Resource)’인 관직ㆍ토지ㆍ명분 등을 나눠 가져야 했기에, ‘사색 당쟁’과 같은 극단적인 ‘내부 공격’이나 ‘분열’과 ‘명분론’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로 ‘개방 세계(Open World)’라는 넓은 ‘바다의 운동장’은 보지 못하고, 좁은 한반도 안에서의 ‘내적 갈등’에 화력을 다 쏟아부었다.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에너지는 결국 ‘안에서 서로를 찌르는 칼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반도 정황(政況) 속에선 바다를 향한 장보고나 안용복다운 ‘개척정신’은 국가 동력으로 흡인되긴 어려웠다. 심지어 구국의 영웅 이순신마저도 그랬다. 국가(지도층)가 그의 거대한 역량을 못 담아내고 오히려 경계하거나 토사구팽하려 했다.  


이런 풍토라면 수많은 인재가 귀양 가거나 낙향ㆍ은둔하고 마는 ‘기이한 문화’를 낳아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개인의 능력이 국가 중심체에 가감 없이 수용되지 못하고 내부 경쟁적ㆍ자해적으로 날 선 문화였기에, 개인이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늘 외로워야 했다. 이는 ‘임진왜란’ 때만이 아니었다. ‘경술국치’ 때도 그랬다. 그런 절체절명의 국난 속에서도 ‘국가와 인적 공조’가 안 돼 분열했고 ‘하나로’ 외세에 맞서지 못했다. 모두 오랜 기간 지정학적 숙명 속에서 잉태된 결과였을 것이다. 


양털 수출로 생계를 이어갔던 변방 빈국 영국이 16세기 ‘바다로 눈을 돌린 순간’ 역사가 바뀌었다. 천민 해적왕 ‘F.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는, ‘부(富)는 바다 건너에 있다’라는 것과 ‘나도 거기로 갈 수 있다’라는 강력한 DNA를 영국 국민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주었다. 소위 ‘풀뿌리 연쇄반응’의 도화선(Trigger)이 되었고, 대영제국으로 가는 국민적 에너지로 승화되었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반 이상이 바닷물에 잠기고 대한민국의 반도 안 되는 땅덩어리면서도 주변 강대국(프랑스ㆍ독일 등)처럼 ‘영토 확장’은커녕, 바다와 싸우며 자국 ‘영토 보존’에 진력했고, 도리어 그 ‘진절머리 나는’ 바다로 나갔다. 북해의 청어어업을 국력의 창의적 소스로 삼아 국부(國富)를 쌓았고, 세계 최초로 개인 모집 ‘주식회사’와 ‘금융시스템’을 창안해 동인도 회사로 발전시켰다. 국가는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해 이를 도왔다. 이 역시 ‘바다 진출’을 국가 융성의 주동력으로 삼았던 사례다. 


일본은 더 흥미로운 나라였다. 중세 봉건적 에도 막부(幕府)였음에도 ‘바다의 창(窓)’은 늘 열려있었다. 수백 년간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出島)’가 그 창이었다. 제한적이나마 줄곧 서양을 모니터링했다. 그들로 수입된 조총은 일본 전국시대통일의 핵심 수단이 되었고,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훗날 나가사키(데지마)는, ‘페리 흑선(1853)의 공포’에 대한 외세 방어의 신속한 대응기지가 되었고,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 국가에 빠르게 들어서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주목할 건, 일본이 근대 국가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절묘한 ‘국가와 인적 공조’, 또 그 지향점이 ‘바다 제패’에 있었음에는 앞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예와 크게 다른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안타까운 건, 이웃 조선은 도통 이런 일본의 ‘정황(政況)’을 알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로 분출된 무사들의 불만을 조선으로 돌려 ‘내부 안정’을 도모하려던 흉계임을 몰랐다. 요시다 쇼인의 소위 ‘정한론(征韓論)’으로 이어진 조선 병탄도 밀물처럼 몰려오는 서구열강의 아시아 식민지화로 인한 ‘자국 공포’의 극단에서 나온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런 일본의 ‘생존 논리’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무지(無知)’로, 조선의 백성은 일본의 국가 에너지가 넘쳐날 때마다 생명을 담보로 그 분출의 ‘쓰레받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바다를 향한 그들의 ‘생존 논리’가 늘 우리의 자존(自存)을 위협하더니 끝내는 5천 년 역사를 끊고 ‘망국의 치욕’을 안겼던 셈이다. 


해양사로 돌아보면, 조선 초기에 이미 유럽은 ‘지리상의 발견’(1400년대 중반) 시대에 돌입했고, 조선 중기(16세기)는 그 선두 주자들(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이 동양을 향하고 있었다. 더구나 구한말은 이미 서구 ‘해양세력(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 크게 발흥(發興)해 ‘일제히’ 동양을 향해 제국주의적 침탈이 난무하던 때였다. ‘임진왜란(1592)’과 ‘일제강점(1910)’은 모두 이 시대와 겹친다. 불행히도, 유구한 한반도 침략 관성*1에 젖은 일본은 그 해양 열강의 문물(조총, 군함 등)을 선점(先占)해 침략을 위한 해양자강에 앞선 반면, 대륙 ‘사대(事大) 관성’에 젖은 조선은 그 거대한 ‘해양 발흥’의 풍랑을 감지하지 못하고 무시하거나 배척했던 게 화근이 된 셈이다. 따라서 이 ‘두 국난’은 시간문제였을 뿐, 필연적으로 ‘예고된 국난’이었을 개연성이 높았다. 


'바다의 타임라인 에필로그' 인포그래픽.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선진 그룹에 들어섰다. 인구가 5천만이 넘는데, 국민소득 1인당 4만 불을 넘었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 세계 6위의 군사 강국, 또 문화콘텐츠 수출국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6.25 사변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으나 한반도의 운명을 갈랐다. 냉전체제로, 북(北)으로는 길이 막혀 오로지 바다로 뻗어 나가야 했다. 여기서 주목할 건, 저 장보고의 해양 진출이 ‘개인 주도’였다면, 이번엔 ‘국가 주도’였다는 점이다. 마치, 저 송나라가 ‘국가 주도’로 바다로 나가 국부(國富) 50% 이상을 가져온 ‘해상 성국(海商 盛國)’으로 성장했듯, 1950~60년대 GNP 약 10%를 가져온 ‘원양어업’이 그 시작이 되었다. 곧이어 파독 ‘광부(1963.12)ㆍ간호사(1966.1)’(약 2만 명)와 중동의 플랜트수출(1973.11)로 개시된 ‘중동특수’는 마치 봇물 터지듯 해외로 나가 1985년까지 누적 총인원이 약 100만 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모두 ‘국가(지도자)와 인적 공조’의 결과였다. 이들 ‘쌈짓돈’은 초기 자본이 되어 중화학공업ㆍ조선업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오늘날 ITㆍ전자 산업, 우주산업, 방산(防産)산업으로 격상하더니, 놀랍게도 K-문화로 진화하여 해외로 뻗어 나갔다. 그야말로 모두가 거침없이 바다로 나가 ‘인력 방패’로 거둔 ‘이삭줍기의 결과’였다. 이제, 저 ‘F.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 후 영국인처럼, 저마다 해외 진출에 두려움이 없어졌다. 지적해 둘 건, 오늘날 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이 남의 나라를 무력 침범해서 이룬 위업이 결단코 아니란 점이다. 오직 ‘인력ㆍ지식 자산’으로 달려 나가 얻은 결과였다. 실로 괄목할 만한 점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대한민국 현대사의 위업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사대’를 벗어나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의 정체성 아래, ‘국가(지도자)와 인적 공조’로 ‘바다 월경(越境)’이라는 국민적 모험성이 만든 쌍화적(雙和的) 결과였다. 북이 ‘공산주의’ 독재 텃밭에, 조선조처럼 ‘육지에 고립(폐쇄)’돼 여전히 ‘사대(事大)’에 머물고 오늘날 세계 최빈국이 된 것과 대조된다.  


문제는 잘살게 되었다 해도 대한민국은 아직도 협소한 ‘육지의 논리’에 매몰되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진영 갈등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바다는 모든 물줄기를 품어 안는다(百川歸海). 그 ‘포용의 지혜’를 배울 때다. 저 ‘역사적ㆍ사회적’으로 소모적인 ‘내부 갈등’에서 벗어나, ‘열린 바다’로 뻗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타협하고 포용해야 한다. 먼저 국가 지도자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피와 땀으로 이룬 오늘의 ‘대한민국 융성’을 다시 쇠퇴의 길로 유도해선 안 된다. 저 유구한 ‘한반도 역사의 아픔’을 교훈 삼아 푸른 바다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장보고ㆍ안용복의 염원이요, 통일을 내다보며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가 우리에게 맡긴 ‘국가적 사명’일 것이다. <바다의 타임라인> 끝

 

*1 한반도 침략 관성: 문헌상 왜(倭)의 한반도 침략이 신라 초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김부식〈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혁거세 거서간 8년(기원전 50년)에 “8년 봄 2월, 왜인이 군사를 이끌고 변방을 침범하려다, 시조(혁거세)에게 신성한 덕이 있음을 보고 돌아갔다(八年 春二月 倭人營兵 欲侵邊 見始祖有神德 乃還)”는 기록을 시작으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400년) 등, 이미 2,000년 전 삼국시대 초기부터 확인할 수 있다.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에서 나온 ‘도해(渡海) 집착’,《일본서기》의 ‘삼한 정벌 설화’(한반도는 일본 속국이라는 악질적인 사상적 주술), 정당한 외교적 명분ㆍ교섭보다 약탈과 기습, 자작극 습성에 익숙한 소위 ‘닌자 거북이 문화’ 등이 모두 왜의 한반도 침략의 원형적 근거가 되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상시 유념할 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정권이나 시대만의 문제가 아닌 ‘지정학적·역사적 관성’도 컸다 함이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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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10-20 12: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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