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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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5장. 민비인가, 명성황후인가
③ 왕비는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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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왕비를 왕의 배우자로 기억하지만, 왕비는 국가 권력의 중심이다.
궁궐 안에서 왕을 보필하고, 왕실의 제사를 주관하며, 후궁을 관리하는 존재가 왕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왕비의 역할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실제 역사 속 왕비는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한 축이었다. 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왕위 계승과 왕실의 혈통을 관리하고, 대신들과 외척 세력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며, 때로는 국정 운영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존재였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에 겉으로는 왕비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통해 국정을 운영했고, 성인이 된 왕이라 하더라도 왕비와 외척 세력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경우는 드물었다. 왕비 한 사람의 선택이 대신들의 운명을 바꾸기도 했고, 왕위 계승의 향방을 결정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왕조의 존망을 좌우하기도 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왕권이 흔들릴 때마다 그 중심에는 왕비와 외척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왕비의 친정 가문은 막강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고, 새로운 왕비가 책봉될 때마다 조정의 권력 구도는 크게 흔들렸다. 사화와 당쟁, 세자 책봉과 폐비 사건,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의 배후에는 언제나 왕비와 외척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왕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왕비를 둘러싼 정치 구조 자체가 권력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에 들어와 이러한 권력 구조는 더욱 크게 변화한다.
왕비는 더 이상 단순한 '중전'이 아니라 황후라는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되었고, 외교와 개혁, 국제 정세 속에서도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로 등장한다. 특히 훗날 명성황후로 불리게 되는 민씨 왕비는 국내 정치뿐 아니라 러시아·청나라·일본 등 열강의 외교 전략 속에서도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녀를 둘러싼 평가는 지금까지도 크게 엇갈리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시 그녀가 단순한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정치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이 장에서는 왕비가 단순한 왕실의 여성이 아니라 어떻게 국가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외척 권력은 어떤 구조 속에서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왜 왕비를 둘러싼 평가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졌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만이 아니라 왕비와 외척이라는 또 다른 권력 축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왜 왕비는 그렇게 강한 권력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왕조 국가의 권력 구조에 있다. 오늘날 대통령의 배우자는 국가 권력을 승계하지 않는다. 배우자의 친정이 정부 요직을 독점하는 일도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왕의 혼인은 개인의 결혼이 아니라 국가 최고의 정치 동맹이었다. 어느 가문의 딸이 왕비가 되느냐에 따라 그 가문은 곧바로 국가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였다. 그로 인해 왕비 한 사람이 궁궐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수백 명의 친족과 정치 세력이 함께 들어오는 구조였다. 왕비의 아버지는 국구(國舅)가 되었고, 오빠와 동생, 조카와 사촌까지도 왕실과 혈연으로 연결되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요직에 진출했고, 인사와 군사, 재정과 외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결국 왕비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 세력이었다.
그래서 왕비는 단순히 왕의 배우자가 아니었다.
왕비 한 사람의 존재는 곧 하나의 가문이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왕비의 친정은 왕실과 혈연으로 연결되는 순간 외척이 되었고, 외척은 왕권을 보좌하는 세력이면서도 동시에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정치 권력이 되었다. 그로 인해 조선 초기의 왕들은 신하보다도, 때로는 반대 세력보다도 외척을 더욱 경계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태종이다.
태종은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흔들림 없는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견제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척이었다. 태종은 자신의 왕비인 원경왕후의 친오빠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1410년(태종 10)에 처형하였고, 이어 민무휼과 민무회도 유배한 뒤 1416년(태종 16)에 사사하였다. 장인인 민제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도 처남 네 형제를 모두 제거한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지나치게 잔혹한 처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태종이 제거하려 했던 것은 혈육인 처남이 아니라 왕권과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또 하나의 권력이었다. 왕세자의 외가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면 왕실 내부에 또 다른 권력 중심이 형성되고, 그것은 결국 왕권을 흔들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실제로 태종은 외척의 성장 자체를 국가의 불안 요인으로 인식하였다.
왕권은 오직 국왕에게 집중되어야 하며, 왕비의 친정이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처럼 조선 초기부터 왕권과 외척의 긴장은 왕조 정치의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태종이 외척을 제거했다고 해서 외척 정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왕비가 존재하는 한 외척도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고 새로운 왕비가 책봉될 때마다 또 다른 외척 세력이 등장했고, 때로는 왕을 보좌하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며, 때로는 왕권과 충돌하는 또 하나의 권력으로 성장하였다.
결국 조선의 역사는 왕권과 외척이 끊임없이 협력하고 견제하며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왕비가 단순한 궁중의 여성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정치적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왕비 한 사람의 책봉은 곧 한 가문의 부상이었고, 그 가문의 부상은 곧 조정의 권력 지형을 바꾸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왕비가 권력이 된 것은 왕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왕실과 혈연으로 연결된 순간 국가 권력의 한 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조 때의 한명회는 이러한 외척 권력의 성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한명회는 원래 왕족이 아니었다. 그는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계유정난을 설계하고 단종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신이었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는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내며 국정을 주도하는 최고 권력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한명회의 권력은 공신의 지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왕실과 혈연으로 연결함으로써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한명회의 장녀는 장순왕후가 되어 예종의 왕비가 되었고, 차녀는 공혜왕후가 되어 성종의 왕비가 되었다. 한 가문의 두 딸이 연이어 국왕의 왕비가 된 것은 조선 역사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 결과 한명회는 단순한 개국공신이나 정승이 아니라, 두 임금의 장인이자 왕실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처럼 권력은 관직에서 끝나지 않았다.
공신으로 얻은 정치적 기반은 혼인을 통해 외척 권력으로 이어졌고, 외척 권력은 다시 왕위 계승과 인사, 국정 운영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왕이 바뀌어도 외척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왕과 혈연으로 연결되면서 권력을 이어 갔다. 권력은 개인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문을 통해 재생산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왕비의 책봉은 단순한 혼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가문이 국가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왕비 한 사람이 탄생하는 순간, 그의 친정은 외척이 되었고, 외척은 왕권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되기도 했으며, 반대로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정치 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한명회의 사례는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공신에서 정승으로, 정승에서 외척으로 권력을 확장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결국 왕비는 단순한 왕의 배우자가 아니었다. 왕비는 권력이 혈연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통로였으며, 왕실과 정치 권력이 만나는 가장 중요한 연결점이었다.
왕비는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문정왕후는 그보다 더 강력하였다.
1545년 명종이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실시하며 국정을 직접 주도하였다. 수렴청정은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대비가 정사를 돌보는 제도였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단순한 보좌를 넘어 최고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명종실록』에는 대신들이 중요한 국정을 먼저 대비에게 아뢰고 재가를 받은 뒤 임금에게 보고하는 기록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형식상 왕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지만, 실제 중요한 결정은 문정왕후의 의중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문정왕후의 권력은 수렴청정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친정인 파평 윤씨를 정치의 중심에 세웠고, 특히 동생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강력한 외척 권력을 형성하였다. 왕실과 혈연으로 연결된 윤씨 가문은 인사와 관직, 정책 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조정의 권력 구조는 사실상 문정왕후와 외척 세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사건이 1545년의 을사사화였다.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 세력은 정적이었던 윤임계열을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고, 수많은 사림과 대신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는 단순한 붕당 간의 갈등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 세력 간 권력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왕보다 윤원형의 권세가 더 무섭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외척의 영향력이 막강하였다.
문정왕후는 불교를 적극 후원하며 폐지되었던 승과도 부활시켰다.
왕후는 불교 사찰을 중창하는 등 국가 정책의 방향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단순히 궁중의 안주인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와 사회, 종교 정책까지 좌우한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권력이 한 사람의 왕비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문정왕후의 권력은 왕실이라는 제도적 권위와 친정 가문의 외척 세력이 결합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왕비의 권력은 곧 외척의 권력이 되었고, 외척의 권력은 다시 국가 권력으로 이어졌다. 왕비 한 사람의 존재가 한 가문의 정치적 부상으로 이어지고, 그 가문의 권력이 다시 국가를 움직이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문정왕후는 조선 역사에서 왕비가 단순한 국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중심이자 외척 정치의 핵심 축이 될 수 있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 말기의 명성황후 역시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명성황후를 둘러싼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뉜다. 어떤 사람은 국권을 지키려다 일본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황후로 기억하고, 또 다른 사람은 민씨 외척 정치의 중심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녀를 단순한 왕비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당시 권력 구조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안에서는 민왕후가 정사를 주관하고, 밖에서는 민승호가 그 명을 받들어 시행하였다." 불과 한 문장이지만 그 시대 권력의 실상을 압축하고 있다. 궁궐 안에서는 왕비가 정치의 중심이고, 궁궐 밖에서는 민씨 외척이 국정을 움직인다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영국 여행가이자 저술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도 명성황후 정치적 위상을 높게 보았다.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한 영국의 여행가이자 저술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1894년부터 여러 차례 조선을 여행하며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저서 Korea and Her Neighbours(『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를 남겼다. 이 책은 당시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외국인의 시각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대표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비숍은 조선의 정치를 관찰하면서 명성황후를 단순한 국왕의 배우자로 보지 않았다. 그는 명성황후를 조선에서 가장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며, 국왕인 고종보다도 정국 운영과 외교 문제에서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특히 그는 명성황후가 궁중 인사와 대신들의 임명, 외교 정책에 깊이 관여하며 러시아·청나라·일본 등 열강 사이에서 조선의 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중심 인물이라고 기록하였다.
비숍의 기록에서 더욱 주목할 점은, 명성황후의 권력이 단순히 궁중 내부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조선의 대신들은 물론 외국 외교관들까지도 중요한 정치 현안을 논할 때 명성황후의 의중을 먼저 살피려 했으며, 그녀의 정치적 판단이 국가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고 전한다. 이는 명성황후가 궁궐 안의 왕비가 아니라 국내외에서 실질적인 정치 행위자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비숍의 기록은 외국인 관찰자의 시각이라는 한계를 지니며, 모든 평가를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비교적 적은 제3자의 관찰이라는 점에서 당시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그의 기록은 적어도 19세기 말 조선의 권력 구조를 바라본 외부 세계가 국왕만이 아니라 명성황후를 국가 권력의 핵심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런 기록들을 볼 때 명성황후는 단순한 왕의 배우자가 아니었다.
국내 정치와 외교의 중심에서 국가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 정치 지도자였으며, 외국인의 눈에도 조선 권력의 핵심 인물로 비쳐질 만큼 강력한 정치적 존재였다. 이는 왕비가 단순한 궁중의 여성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한 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실제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여흥 민씨 출신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요직에 임명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민영익, 민영환, 민응식, 민병석 등은 외교와 군사, 재정, 인사 분야의 핵심 직책을 맡았다. 물론 이들 모두를 혈연만으로 등용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특정 가문이 국가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명성황후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조선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수십 년 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세도 정치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관직은 능력보다 혈연과 혼맥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왕실 혼인은 곧 국가 권력의 재편을 의미하였다. 명성황후 시기의 민씨 세력 역시 이러한 정치 구조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런 현실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은 일본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칭하는 을미왜변 때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은 이후에도 의도적으로 '명성황후'보다 '민비'라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황후라는 국가적 권위를 지우고 단순히 민씨 집안의 여성으로 격하시킴으로써 대한제국 황실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언어 전략이었다. 언어는 총칼보다 먼저 움직였다. 침략은 군사력으로 이루어졌지만, 지배는 언어를 통해 완성되었다.
왕비 권력은 조선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중국 청나라의 서태후는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40여 년 동안 사실상 제국을 통치하였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기 선전 속에서 사치와 부패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국가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왕비는 권력의 상징이자 비난의 대상으로 소비되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결국 왕비는 단순히 왕의 배우자가 아니었다. 왕비는 왕권과 외척, 혈연과 정치, 국가와 가문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국가 운영이 법과 제도보다 혈연과 혼맥에 의존할수록 왕비의 정치적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의 왕들은 외척을 경계했고, 외척은 끊임없이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오려 했으며, 왕비는 언제나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많은 기록을 고려해 볼 때 왕비의 역사는 궁궐 안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왕조 국가에서 권력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에게 집중되며,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정치사의 핵심이다. 왕비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한 왕조의 권력 구조와 정치 시스템을 함께 읽게 된다. 그리고 그때 왕비는 더 이상 왕의 곁에 서 있는 조용한 존재가 아니라, 한 시대의 운명을 좌우했던 가장 강력한 정치적 행위자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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