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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근의 역사 다시 읽기(15)] 역사 속 여성 권력은 왜 악녀로 기억되었는가. 부산경제신문 편집국 2026-07-05 06:26:44

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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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5장. 민비인가, 명성황후인가

              ⑤ 역사 속 여성 권력은 왜 악녀로 기억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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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권력을 기록한다. 그러나 모든 권력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같은 권력을 행사했더라도 누구의 권력이었는가에 따라 역사 속 평가는 크게 달라졌다. 왕이 강한 통치력을 발휘하면 성군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실패하면 폭군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왕비나 대비, 황후가 국정을 주도하면 먼저 '전횡', '외척 정치', '악녀'라는 이름이 따라붙는 경우가 많았다. 남성의 권력은 국가를 위한 정치로 설명되었지만, 여성의 권력은 개인의 욕망이나 권력 집착으로 해석되는 일이 훨씬 많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성들이 실제로 더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유교 사회와 남성 중심의 역사 기록이 여성 권력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을까. 역사는 언제나 사실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시대의 질서 역시 함께 기록한다. 따라서 여성 권력에 대한 평가 역시 당시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반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모든 여성 권력이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외척의 전횡으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사례도 있었고,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국정을 이용한 경우도 존재했다. 그러나 남성 군주의 권력은 정치적 성과와 실패를 중심으로 평가받은 반면, 여성 권력은 정치적 능력보다 성별 자체가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같은 행동이라도 남성이 하면 결단력이 되고, 여성이 하면 전횡이 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역사를 남성들의 무대로 기억한다.

왕과 장군, 재상과 혁명가의 이름은 쉽게 떠올리지만, 여성은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을 보좌하는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린 국왕이 즉위했을 때는 대비가 국정을 대신했고, 왕조가 위기에 처하면 왕비가 외교와 정치를 움직였으며, 황제가 무능할 때는 황후가 국가 운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여성 권력은 결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있다.

권력을 행사한 남성은 뛰어난 정치가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지만, 같은 권력을 행사한 여성은 탐욕스럽고 잔혹한 인물로 기록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국정을 안정시켜도 '외척의 전횡'이라 불렸고, 개혁을 추진해도 '권력욕'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나라를 지키려 한 노력조차 '정치 개입'이라는 비난으로 남기도 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력의 의미 자체가 달라졌던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그 이유는 여성이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권력을 기록하고 평가한 사람이 대부분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유교 사회는 정치의 중심을 남성에게 두었고, 여성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여성의 정치력은 능력보다 야망으로, 국가 운영은 사사로운 욕심으로, 결단은 전횡으로 번역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기록은 사실보다 더 강한 기억이 되었고, 후대 사람들은 여성 정치인을 먼저 '악녀'라는 이미지로 만나게 되었다.


물론 모든 여성 권력이 훌륭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거나 외척 중심의 정치를 펼친 사례도 존재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에게 적용된 평가의 기준이 과연 같았는가 하는 점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남성에게는 정치력이 되고 여성에게는 전횡이 되었다면, 우리는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이 장에서는 조선의 정희왕후와 명성황후, 중국의 서태후를 비롯한 여러 사례를 통해 여성 권력이 실제로 어떻게 행사되었는지, 그리고 후대는 왜 그들을 유난히 '악녀'로 기억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는 여성을 어떻게 기록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기록을 얼마나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역사 속 여성 권력을 다시 읽는 작업은 시작된다.


  역사 속 여성 권력의 이미지 그림

정희왕후 역시 흥미로운 사례다.

세조가 죽고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실시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어린 국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왕권을 안정시키고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권력을 대신 행사했다는 점에서는 문정왕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문정왕후는 외척 정치와 권력욕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는 반면, 정희왕후는 조정을 안정시킨 현명한 대비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두 사람 모두 왕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했지만, 역사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남겼다. 결국 사람들은 권력을 행사한 방식보다 그 권력이 남긴 결과와 후대가 선택한 기억을 더 오래 기억한다. 여성 권력의 평가는 사실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시대가 선택한 기억이 그들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대한제국 말기의 명성황후는 이러한 문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유학자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안에서는 민왕후가 정사를 주관하고, 밖에서는 민승호가 그 명을 받들어 시행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불과 한 문장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인식한 권력 구조를 그대로 보여 준다. 궁궐 안에서는 왕비가, 궁궐 밖에서는 민씨 외척이 국정을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민영익, 민영환 등 여흥 민씨 인물들이 핵심 관직을 맡는 기록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는 명성황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조선 정치가 외척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현실을 보여 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외국인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을 방문한 뒤 남긴 기록에서 명성황후를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가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하며, 고종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묘사하였다. 적어도 외국인의 눈에는 명성황후가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조선 정치의 중심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그녀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1895년 을미왜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에도 계속해서 '명성황후' 대신 '민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황후라는 국가적 상징을 지우고 특정 가문의 여성으로 축소함으로써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언어 전략이었다. 여성 권력을 제거한 뒤에는 그 권력의 기억까지 바꾸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청나라의 서태후 역시 오랫동안 '청나라를 망친 악녀'라는 이미지로 기억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훨씬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서태후는 청불전쟁 이후 군제 개혁과 신정(新政)을 추진했고, 과거제 폐지와 신식 교육 도입도 허용하였다. 물론 그녀의 정치에는 한계와 실패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역할보다 사치와 권력욕만이 강조되어 왔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 세력은 그녀를 사치와 향락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오늘날까지도 널리 알려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라는 말 역시 그녀가 실제로 했다는 확실한 사료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실보다 이미지를 기억했다. 혁명은 왕비를 먼저 악녀로 만들었고, 그 이미지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 살아남았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도 비슷하다.

그녀는 흑해를 확보하고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시킨 군주였으며,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행정과 교육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후대에는 정치적 업적보다 연애와 사생활이 더 많이 이야기되었다. 남성 군주였다면 정치력으로 평가받았을 부분이 여성 군주에게는 도덕성의 문제로 바뀌었던 것이다.


결국 여성 권력은 실제 모습 그대로 기억되지 않았다.

권력은 여성을 평가하기 전에 먼저 이미지를 만들었다. 복잡한 정치가보다 '악녀'라는 한마디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훨씬 오래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 속 여성은 정치가이기 전에 하나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여성 권력의 역사만큼은 기록보다 이미지가 먼저 만들어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여성 권력을 이해하려면 먼저 "잘했다"와 "잘못했다"를 따지기보다 세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그녀는 악녀가 되었는가.

누가 그 이미지를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 이미지는 누구에게 가장 유리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역사는 여성의 권력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권력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선택해 온 과정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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