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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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6장. 을사조약인가, 을사늑약인가
① 조약과 늑약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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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사건을 이해할 때 먼저 이름부터 받아들인다.
그리고 대부분 그 이름을 의심하지 않는다. '임오군란', '을미사변', '광주사태', '광주민주화운동'처럼 역사 속 사건들은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그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하나의 해석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에서 이름은 사실을 설명하는 언어인 동시에 사실을 해석하는 언어가 된다.
을사조약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랫동안 교과서를 통해 '을사조약'이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배워 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것은 조약이었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가.
단어 하나가 달라졌을 뿐인데 사람들의 역사 인식은 크게 달라진다.
'조약'이라고 하면 국가 간 외교적 합의가 먼저 떠오르고, '늑약'이라고 하면 강압과 주권 침탈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이름 하나가 사건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조약과 늑약의 차이는 단순한 용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제국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외교 협정을 체결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제국주의의 무력과 압박 속에서 국가의 주권을 빼앗긴 것이었는지를 묻는 역사적 질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도 두 표현이 함께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연구자는 '을사조약'이라 부르고, 또 다른 연구자는 '을사늑약'이라 부른다.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 역시 두 용어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일까. 아니면 하나의 사건 안에 두 이름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약'과 '늑약'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래 조약(條約)은 국가와 국가가 대등한 위치에서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 체결하는 국제적 약속을 뜻한다. 국제법 질서에서 조약은 국가의 자발적인 의사를 전제로 한다. 물론 현실의 국제정치에서는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힘의 차이가 존재하며, 완전히 평등한 협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자유로운 동의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조약의 기본 원리이다.
반면 늑약(勒約)의 '늑(勒)'은 억누르고 강제로 몰아붙인다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늑약은 자유로운 합의가 아니라 압박과 강요 속에서 체결된 협약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대등한 협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는 사실상 선택권을 박탈당한 채 서명을 강요받는다. 따라서 늑약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체결 과정의 강압성과 주권 침해를 강조하는 역사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을사조약 채결 당시 이미지좀 더 자세한 상황 파악을 위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로 돌아가 보자.
대한제국은 이미 외교적·군사적으로 일본의 강한 압박 아래 놓여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인정받았고, 서울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들에게 외교권 박탈을 요구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고, 경운궁은 일본군에 의해 사실상 포위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신들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외교적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고종은 끝까지 조약 체결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재가 없이 문서가 성립되었다는 점은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를 단순한 외교 협상이 아니라 한다.
그렇다. 강압 속에서 체결된 불평등 협약으로 이해하며 '을사늑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당시 대한제국 내부에서도 거센 저항이 이어졌다. 민영환과 조병세는 국권 침탈에 항거하며 자결하였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이 문서를 단순한 외교 협정이 아니라 국가 주권을 빼앗긴 사건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에도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이라는 두 명칭이 함께 사용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국제 외교가 언제나 힘의 논리와 법적 형식이 함께 작동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협상에는 군사력과 외교력, 경제력이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모든 불평등한 협정을 곧바로 늑약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결국 어디까지를 외교적 합의로 보고, 어디부터를 강압에 의한 협약으로 볼 것인가는 역사적 해석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을 형식과 본질이라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을사조약'이라는 명칭은 외교문서의 형식을 기준으로 한 표현이다. 일본은 대한제국 대신들과 협약 형식을 갖추고 조항과 서명 절차를 남겼다. 따라서 외교문서나 국제정치사의 서술에서는 관례적으로 '조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을사늑약'이라는 명칭은 체결 과정의 실질적 성격에 주목한 표현이다.
일본군의 무력 배경, 대신들에 대한 압박, 고종의 반대와 황제 재가의 부재 등을 고려하면 이를 자유로운 국가 간 합의로 보기 어렵다는 역사적 판단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조약'은 형식을 설명하는 이름이고, '늑약'은 본질을 설명하는 이름인 셈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842년 청나라가 영국과 체결한 난징조약은 형식상 조약이었지만, 아편전쟁 패배 이후 군사적 강압 속에서 체결된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일본 역시 미국 페리 함대의 무력 시위 이후 체결한 미일화친조약과 이어진 여러 불평등조약을 오랫동안 국가적 굴욕의 역사로 기억해 왔다. 이처럼 국제사회에서는 문서의 형식은 조약이지만, 체결 과정의 강압성과 불평등성 때문에 사실상 늑약에 가까운 사례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조약과 늑약을 구분하는 기준은 문서의 명칭 자체에 있지 않다.
핵심은 국가가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합의했는가,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압력 속에서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는가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명칭 그 자체가 아니라, 명칭이 만들어 내는 역사 인식이다. '조약'이라고 부르면 국가 간 외교적 합의라는 인상이 먼저 떠오른다. 반대로 '늑약'이라고 부르면 강압과 주권 침탈이라는 역사적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름 하나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과 책임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속 이름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어떤 이름을 선택하느냐는 곧 어떤 역사관을 선택하느냐와 같다. 을사조약인가, 을사늑약인가라는 논쟁 역시 단순한 용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를 자유로운 국가 간 합의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제국주의의 강압 속에서 이루어진 주권 침탈로 이해할 것인가를 묻는 역사 해석의 문제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무엇이 어떻게 불렸는가를 함께 기록한다. 사건은 한 번 일어나지만, 그 사건에 붙은 이름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을 지배한다. 그래서 조약과 늑약의 차이를 묻는 일은 단순한 용어의 구분이 아니라, 권력과 국제질서가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보는 역사 인식의 출발점인 것이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