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훈 칼럼니스트드레이크가 영국민에게 보여준 바다는 앞마당인 ‘도버해협’이나 ‘북해’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세계의 바다’였다. 일개 부랑민 출신인 ‘해적선’ 선장이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 누구라도 ‘바다의 모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가 남긴 공적은 그의 사후, 17세기 들어 세계 바다패권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찬연히 빛을 발하게 된다.
먼저는, 영국민이 얻은 해양의 DNA와 자신감이다. 드레이크가 세계 일주한 이후 스페인의 ‘거대한 부(富)’를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고, 이는 유럽대륙의 영토싸움에서 벗어나 ‘바다의 통제권(制海權)’만을 국가의 최우선 생존 전략으로 삼게 되었다. 이는 동인도 회사(1600.12)의 도약과 신대륙 개척(17세기 초~중반)으로 이어졌다. 특히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 본격적으로 침투해 단순한 무역회사를 넘어 ‘아시아 식민지 개척의 선봉장’이 된다. 더구나 드레이크가 이미 북미 서안에 선포했던 ‘뉴 알비온’(새로운 영국)의 정기를 이어받아, 영국인들은 북미(제임스타운, 1607; 메이플라워호, 1620)로 이주해 본격적인 대영제국의 영토적 기반을 닦기 시작한다.
17세기에 들어 주목할 건,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6)의 네덜란드 격파다. 스페인이 쇠퇴한 후, 전 세계 물류를 쥐고 바다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건 ‘바다의 마부(The Wagoners of the Sea)’라 불리던 네덜란드였다. 이 나라를 격파하기 위해 영국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발표한 게 ‘항해조례(Navigation Acts, 1651)’*1였다. 영국 국익만을 위한 철저한 해상 보호무역주의로, 이에 반발한 네덜란드와 3차에 걸친 영란전쟁(英蘭戰爭)(1652~1674)을 모두 이겨 네덜란드를 굴복시키고 상업과 금융의 주도권을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이동시킨다.
18세기 말~19세기 들어 마지막 남은 맞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바다를 건너 영국을 침공하려 할 때, 트라팔가(Trafalgar)해전(1805)에서 넬슨(H. Nelson) 제독이 프랑스ㆍ스페인 연합함대를 궤멸시킨다. 이로써 향후 100년간 지구상에서 적수 없는 유일한 바다의 지배자, 즉 ‘해지지 않는 나라’의 정점에 우뚝 선다. 이런 국운 융성은 18~19세기 산업혁명(1760~1820)과 ‘팍스 브리태니커(Pax Britannica)’*2로 이어졌다. 바다의 패권국으로서의 대외적 국력 신장과 정치적 안정, 그리고 세계 각지의 식민지를 확보하면서 국가의 경제 촉진으로 이어져 각종 기계화 진화로 연결되어 급속한 산업혁명(영국 중심)의 시대를 가져온 것이다. 흥미로운 건, 스페인은 저 잉카문명과 아스테카 문명 파괴 등, ‘약탈ㆍ살인’의 식민지 진출이었다면, 영국은 본국인 ‘거주ㆍ관리 중심’의 식민지 건설로 후일 ‘영연방(Common Wealth)’*3 구축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세계 최초로 바다를 ‘과학과 탐사의 현장’으로 바라본 점이다. 우선은, ‘찰스 다윈의 탐사’로 널리 알려진 ‘비글호(HMS Beagle)의 탐험(1831~1836)’이다. 애초 군용ㆍ상업적 용도로 항로ㆍ수심을 파악해, 해도 작성이 목적이었는데, 다윈에 의한 해양생물학적 탐사가 병행돼 훗날 ‘진화론’ 구축에 토대가 되었다. 이는, 더 나아가 챌린저 세계해양탐사(HMS Challenger expedition, 1872~1876)로 이어졌다. 학자ㆍ해군의 상호협조하에 약 5년간 130,000km 항정(航程)을 탐사ㆍ측량했고, 4,000여 새로운 종(種)을 발견했다. 해양학적으로는, 전 세계 바다의 깊이, 수온ㆍ염분, 순환 조사는 물론 해연(海淵)의 발견, 심해 바다의 유기생물 분포까지 탐사했다. 세계 바다의 ‘염분(Salinity) 농도가 일정’하다는 것도 이 항해에서 발견했다. 마젤란ㆍ드레이크에 이어 실로 3번째 또 다른 세계 일주였다. 이러한 탐사로 축적된 ‘해양과학적 지식’은 영국의 세계 바다 패권국 기반 조성에 큰 역할을 한 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F. Drake, ‘대영제국의 Legend’가 되다 」인포그래픽지금까지 우리는 영국의 혼란한 시대상 속에서, 극도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교육도 받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바다를 품어야 했던 한 천출의 인간,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일대기와 그가 남긴 업적을 살펴보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그를 발탁해 변방의 빈곤 국가 영국을 융성케 하는 과정을 보면서, 한나라 국가부흥의 길목엔 실로 ‘국가지도자와 인재 공조’가 핵심임을 깨닫게 한다. 국익에 필요한 인재라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기용해 국가발전에 활용했던 16세기 영국 여왕(지도자)의 유연한 실용주의적 사고에 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이런 국가의 풍토에서, 드레이크가 만든 ‘선례(Precedent)’는 역사의 타임라인 속에서 영국의 시스템으로 굳어졌다. ‘야생의 해적’을 국가가 예우해 제독으로 삼아 신분과 명분론에 갇힌 군대를 벗어나 실력과 전과(戰果) 중심의 실용적인 조직으로 진화시켰다. 드레이크의 바다 정기는 이후 크롬웰(17세기)→넬슨(18~19세기)→처칠(20세기)로 이어져 영국을 호위하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되었다. 또 해외 식민지의 증가로 산업혁명이 가속화되고, 이로써 얻어진 국부(國富)는 사회ㆍ경제적 안정화로 이어졌으며, 나아가 셰익스피어ㆍ뉴턴ㆍ다윈 등을 낳아 과학ㆍ문화적 황금기를 가져온다. 이로써 18~20세기 초까지 대영제국의 위용을 세계사 곳곳에 남긴 것은 깊이 유념해 볼 일이다.
드레이크는 말했다. “평안함은 땅에 있을지언정, 영광은 바다에 있다.”*4고. 영국은 그 바다의 영광을 좇는 해적을 품어 제국의 돛을 올렸으나, 같은 시대, 조선은 바다에서 영광을 빛낸 영웅들을 도리어 땅의 쇠사슬로 묶어 버렸다. 바다를 영광의 무대로 보았는가, 혹은 두려움과 유배지로 보았는가. 이 작은 「시선의 차」가 훗날 거대한 「국력의 차」를 갈랐다. 인재를 품어 국가의 ‘시스템과 장기적 비전’으로 승화시킨 영국을 살펴보면서, 사실상 ‘바다 천시의 국시’ 탓에, 바다 강국이 된 왜(倭)에게 두 번의 ‘역사적 치욕(1592, 1910)’을 겪었던 우리를 다시 보게 한다. ‘사대(事大)’란 이름으로 ‘대륙’만 바라보고, 한반도에만 「숙명적」이라 안주(安住)했던 우리의 의식, 우리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이참에 상고(詳考)해 볼 때가 아닐까 한다. (3부작 끝)
*1항해조례(Navigation Acts, 1651):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새로운 바다의 강자로 떠오른 네덜란드를 격파하기 위해 내세웠던 조례. “영국과 영국 식민지에 들어오는 모든 물품은 식민지 배와 영국 배로만 수송해야 한다”는 철저한 자국 해상 보호무역주의 조례. 이에 대한 네덜란드의 반발로 벌어진 3차에 걸친 영란전쟁을 모두 이겨 네덜란드는 국운이 꺾이고 세계 해상 패권을 영국이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됨. 이 조례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인 1849년에 폐지됨.
*2팍스 브리태니커(Pax Britannica): ‘영국에 의한 평화’란 뜻의 라틴어로서, 영 제국이 대부분의 세계 주요 해상 무역로를 관리하면서 사실상 다른 나라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해상 장악권을 구사하여 유럽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시기(1815~1914)를 가리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흔히 ‘팍스 아메리카나’로 바뀌었다. 미국 중심의 세계 패권으로 변화했음을 상징한다.
*3영연방(Common Wealth): 과거 영국의 식민지를 중심으로 구성된 영국 중심의 국제적인 국가 공동체. 현재 56개국으로 구성돼 있다. 영연방 국가 간에는 각종 혜택이 주어지고 상호교류가 허용된다. 영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여전히 큰 것도 UN 등에서 이 공동체의 국제적인 단합 효과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4『Comfort may be found on land, but glory belongs to the sea.』드레이크의 이 명언은, 그의 세계 일주 중 가장 처절한 순간에 나온 말로 알려진다. 세계 일주 중 1578년 가을, 남미와 남극 사이의 거대한 해협(현 Drake Passage)에서 마주친 거친 폭풍우로 5척 중, 3척은 침몰, 1척은 본국으로 귀항하고, 오직 기함 ‘Golden Hind호’만 남아 가까스로 남미 최남단 거친 섬(Cape Horn 부근)에 상륙해, 탐험을 포기한 ‘영국 귀항’과 ‘태평양 계속 항진’ 결정 과정에서, 홀로 섬 남쪽 끝 절벽에 올라 거친 남극해를 바라보며 나온 명언으로 알려졌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