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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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누가 근대를 설명하는가>
5장. 독립신문은 누구의 신문이었는가
② 근대 언론의 신화가 된 『독립신문』은 누구의 신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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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복잡한 일을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한 사람을 떠올릴 때도 그의 삶 전체를 기억하기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처럼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든 일도 어느 한 사람의 공로가 되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던 사건도 한 사람의 결단이나 신념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렇게 기억은 점점 단순해지고, 이야기는 이해하기 쉬워진다.
역사도 다르지 않다. 실제의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국제정세, 권력과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런 복잡한 과정은 점차 사라지고, 몇 명의 영웅과 몇 개의 상징적인 사건만 남는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기억하지만, 정작 그 속에 숨겨진 배경과 갈등은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역사는 이해하기 쉬워질수록 오히려 실제 모습에서는 멀어지기도 한다.
독립신문을 둘러싼 기억 역시 그러하다. 오늘날 우리는 『독립신문』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민족 계몽의 출발점', '애국자 서재필이 창간한 신문'이라는 몇 가지 이미지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신문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으며, 누가 창간 자금을 지원했고, 당시 어떤 정치적 환경 속에서 운영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과는 다른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신문은 곧 서재필이다. 그리고 서재필은 근대 언론의 개척자이자 민중을 깨운 계몽 지식인의 상징처럼 기억된다. 교과서는 오랫동안 그를 “독립사상의 선구자”로 설명했고, 독립신문은 마치 순수한 민족 계몽운동의 출발점처럼 묘사되어왔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틀린 기억은 아니다. 실제로 서재필은 조선 사회에 새로운 언론 문화를 도입하려 했고, 한글 신문을 통해 대중과 직접 소통하려 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매우 새로운 시도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기억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데 있다.
역사는 언제나 한 사람으로 설명될 수 없는데도 우리는 자꾸만 구조를 지우고 인물만 남긴다. 독립신문 역시 그렇다. 그것은 한 개인의 순수한 이상만으로 탄생한 신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 정부의 정치적 필요와 외세의 압력, 개화 관료들의 전략, 그리고 국제질서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만들어진 정치적 매체에 가까웠다.
갑오개혁 이후 조선 정부 내부에서는 이미 근대적 신문 창간의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었다. 개화 관료들은 서구 사회를 경험하면서 언론의 힘을 절감하고 있었다. 신문은 단순히 소식을 전달하는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여론을 만들고, 권력을 움직이며, 국가 운영 방향을 조정하는 정치 장치였다. 특히 외교를 경험한 인물일수록 언론이 국가 권력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일본·러시아·미국이 충돌하는 거대한 국제질서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총칼만이 조선을 흔드는 것이 아니었다. 언론 역시 하나의 무기였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한성신보』였다.
그 신문은 겉으로는 민간신문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외무성의 지원 아래 움직이는 정치 선전 기관에 가까웠다. 특히 고종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자 조선 정부 내부에는 강한 위기감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언론 비판이 아니었다. 외국 세력이 조선의 수도 한복판에서 여론을 조직하고 왕권 자체를 흔드는 사건처럼 받아들여졌다.
1905~1910년경으로 추정되는 <한성신보사> 건물 / 출처: 포토뉴스 2015. 03. 20.
조선 정부 입장에서 언론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박정양을 비롯한 친미 개화 관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국 사회를 경험했던 이들은 일본이 신문을 통해 조선의 여론을 장악할 경우 조선 정부가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독립신문 창간은 단순한 계몽운동 이전에 먼저 정치적 대응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독립신문을 시민사회가 자발적으로 만든 독립 언론처럼 기억하지만, 실제 창간 과정은 정부 권력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상징적인 것은 ‘독립신문’이라는 이름 자체였다. 그것은 서재필 개인이 만든 명칭이 아니라 고종이 직접 하사한 이름이었다. 신문의 이름이 국왕의 정치적 판단 속에서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이는 독립신문이 처음부터 국가 권력의 정치 프로젝트 속에서 움직였음을 보여 준다.
운영 구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문 운영 자금은 정부 공금에서 차관 형식으로 지원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민간신문이었지만 실제로는 정부 재정과 정치적 후원 속에서 움직이는 매체였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한 독립 언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셈이다.
독립신문 누구의 신문인가. 그림 이미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재필의 역할이 작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미국 시민권자라는 특수한 위치를 활용해 조선 내부에서는 확보하기 어려웠던 언론 활동 공간을 만들어 냈다. 당시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이었고, 외국인의 신분은 때로 조선인보다 더 큰 정치적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미국 시민 필립 제이슨이었던 서재필은 바로 그 틈새를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구조 전체를 설계한 절대적 창조자라기보다, 특정 정치 상황 속에서 선택된 핵심 실무자에 가까웠다.
초기 독립신문의 논조 역시 이러한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영문판 기사에서는 독립문 건립의 결정 주체가 국왕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고종의 결정을 적극 찬양하고 있다. 이는 독립신문이 초기에는 고종과 아관파천 정부의 정치 노선을 상당 부분 대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신문의 논조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특히 “독립”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는 독립신문의 ‘독립’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 독립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당시 독립신문이 가장 강하게 강조한 것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청의 영향력이 약화 되자 독립신문은 일본의 승리를 조선 자주의 계기로 묘사하는 논조를 반복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역사 기억과 상당히 다르다. 훗날의 기억 속에서 독립신문은 항일 민족지로 정리되었지만, 실제 1890년대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당시 개화 엘리트들은 일본·러시아·미국·청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야 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이념보다 생존과 국제질서 속의 선택이었다. 언론 역시 그 현실 정치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서재필의 독립신문 매각 시도였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독립신문을 일본 측에 넘기는 방안을 논의했다. 실제로 일본 공사관과 구두 계약 단계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 거래가 이루어졌다면 독립신문은 일본 세력과 연결된 매체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독립신문의 이미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 단순히 “서재필은 친일이었다”라는 식의 도덕적 결론을 내리는 일이 아니다. 그런 방식은 또 다른 단순화일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당시 개화 엘리트들이 얼마나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들은 이상만으로 움직인 사람들도 아니었고, 현실만 좇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너져 가는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라는 약소국이 살아남기 위해 외세를 활용하려 했고, 언론 역시 그러한 전략의 일부로 움직였다. 독립신문은 바로 그 시대의 모순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은 누구 한 사람의 신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종과 정부 권력의 정치적 필요였고, 개화 관료들의 전략이었으며, 외세 경쟁 속에서 탄생한 근대 정치 매체였다. 동시에 서재필 개인의 이상과 현실적 선택이 교차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종종 근대를 영웅의 이야기로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실제 근대는 훨씬 복잡했다. 그 속에는 권력과 자본, 외세와 언론, 국가와 개인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하며 얽혀 있었다. 독립신문은 계몽의 상징인 동시에 권력이 만든 언론이었고, 자주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국제정치의 계산 속에서도 움직였던 모순의 매체였다. 어쩌면 우리가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독립신문 자체만이 아니다. 우리가 근대를 기억하는 방식, 그리고 영웅을 만들어 내는 역사 서술의 구조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