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
< 제2부 : 누가 근대를 설명하는가>
5장. 독립신문은 누구의 신문이었는가
③『독립신문』은 왜 일본을 높이 평가했는가
---------------------------------------------------------
역사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높이 평가하는 데에는 대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상대국의 제도와 문명을 발전의 본보기로 여겼거나, 자국의 개혁을 지원해 줄 세력으로 기대했을 때 그러한 평가가 나타났다. 때로는 국제질서의 승자로 떠오른 강대국과 가까워지는 것이 국가의 생존과 발전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따라서 외국에 대한 찬양은 단순한 호감의 표현이라기보다, 당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개혁 방향이 반영된 선택인 경우가 많았다. 그 나라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곧 자국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독립신문』이 일본을 바라본 시선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을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든 제국주의 국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 무렵의 일본은 아직 조선을 병합하기 이전이었으며, 일부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빠르게 근대 국가로 성장한 개혁의 본보기로 비쳤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물리친 일본의 승리는 그들에게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낡은 전통 질서에 대한 근대 문명의 승리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서재필이 다시 조선을 향해 돌아오던 무렵이다. 조선은 바로 그 거대한 격랑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질서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마치 오래된 집은 허물어졌는데 새집은 기초공사조차 끝나지 않은 것과 같았다. 안에서는 관리들의 수탈과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밖에서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충돌하면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수백 년 동안 조선의 대외 질서를 지탱해 온 청나라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그러나 그 빈자리가 곧바로 조선의 자주적인 공간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일본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부상하고 러시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조선은 더욱 복잡한 국제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러한 전환기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일본의 근대화와 청일전쟁의 승리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렇다면 『독립신문』은 일본이 조선에서 벌인 군사적·정치적 개입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일본을 조선이 따라야 할 근대화의 본보기이자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해 준 세력으로 판단했던 것일까. 『독립신문』의 친일본적 논조를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결과를 과거에 그대로 대입하기보다, 서재필과 당시 개화파가 일본을 어떤 존재로 인식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인식은 새로운 국가의 방향을 둘러싸고 여러 주장이 충돌하던 당시의 혼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 중심의 전통적 질서는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질서가 곧바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일본식 근대화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나 서구 열강과 손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왕실 역시 여러 외세와 정치 세력 사이에서 흔들리며 일관된 개혁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낡은 질서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어나지 못한 과도기였다. 왕실은 외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고, 개혁 세력과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세력은 국가의 진로를 놓고 충돌했다. 관리들의 수탈과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백성들의 삶도 크게 흔들렸다. 누구도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으며, 하나의 사건과 선택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만큼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독립신문』이 일본을 바라본 시선 역시 이처럼 조선 사회 전체가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던 시대적 혼란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한 혼란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외국 군대가 조선의 왕궁을 무력으로 장악하면서 수백 년 이어져 온 정치 질서는 결정적인 균열을 맞았다. 이어 추진된 갑오개혁은 신분제와 행정 체계, 재정과 군제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의 낡은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 개혁은 순수하게 조선 스스로 만들어 낸 자생적 개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일본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결과만도 아니었다. 조선 내부에서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온 개혁의 요구와 일본의 군사적 압력이 서로 얽혀 만들어진 복합적인 변화였다.
바로 이 모순 속에서 조선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근대는 새로운 질서가 완성된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외세의 압력과 내부의 개혁 의지가 충돌하고 협력하는 복잡한 과정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조선의 근대는 처음부터 희망과 좌절, 자율과 타율이 함께 공존하는 모순된 출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격변의 시기에 갑신정변 이후 역적으로 몰렸던 개화당 인물들에게도 다시 길이 열렸다. 박영효와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복권되었고, 한때 몰락한 듯 보였던 개화 세력은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걸어 나오는 듯했다. 박영효는 미국에 머물고 있던 서재필에게 귀국을 권유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흩어졌던 개화파의 인맥이 다시 조선을 변화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서재필에게 귀국은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어렵게 삶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병원을 개업했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무엇보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개혁을 꿈꾸었으나 삼일천하로 끝난 기억, 동지들의 죽음과 망명, 조선 정치에 대한 환멸은 쉽게 지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국은 그에게 돌아가야 할 공간이면서도, 다시 들어가기 두려운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끝내 그의 사유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조선은 무너지고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향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서재필은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 갈등 속에서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그것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었다. 실패한 개혁가가 다시 역사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선택이었다.
그런 끝에 1895년 겨울, 그는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와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은 그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갑신정변 실패 뒤 몸을 숨겼던 곳이자, 근대 군사교육과 새로운 정치사상을 접했던 곳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근대 국가의 모습을 보았고, 동시에 조선이 얼마나 위태로운 위치에 놓여 있는지도 절감했을 것이다. 마침내 그가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조선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갑오개혁 이후 권력 구조는 흔들리고 있었고,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 일본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조선은 변화의 문턱에 서 있었지만, 그 변화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귀국한 서재필이 먼저 준비한 것은 권력이 아니라 신문이었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고 있었다. 권력 내부의 개혁은 민중의 기반 없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개혁만으로는 나라를 바꿀 수 없었다. 조선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인이 스스로 시대를 이해하고 현실을 인식해야 했다. 바로 그 문제의식 속에서 『독립신문』 창간 구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고, 정치적 후원도 필요했다. 서재필은 박영효와 박정양 등 개화 세력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 결과 정부로부터 창간 자금과 정착비를 지원받았고, 중추원 고문직과 급여도 약속받았다.
이 지점에서 독립신문의 역설이 드러난다. 독립과 자주를 말하는 신문이었지만, 그 출발은 정부 재정과 정치 권력의 후원에 기대고 있었다. 더구나 서재필은 이후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일본 자금 지원까지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자주적 언론을 만들기 위해 국고와 외세의 자금에 동시에 의존해야 했던 현실은, 조선 근대화가 지닌 구조적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이를 두고 곧바로 서재필을 단순히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진정한 독립과 자주를 말하려 했다면, 왜 신문 창간비에 맞먹는 막대한 주택 구입비를 정부 지원금으로 받았는가. 왜 일본의 영향력을 경계하면서도 일본 측 지원 가능성을 열어 두었는가. 이 대목은 서재필의 이상과 현실적 선택 사이에 놓인 긴장을 보여 준다.
『독립신문』은 바로 이러한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계몽과 자주독립을 내세웠지만, 권력과 자금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민중을 깨우고 새로운 시민의식을 확산하려 했으나, 그 출발은 조선 정부와 개화 관료들의 정치적 필요와도 맞닿아 있었다. 자주를 말하면서도 외세가 각축하는 현실 속에서 활동해야 했던 것, 그것이 『독립신문』이 지닌 근대의 복합적인 얼굴이었다.
이러한 모순과 긴장은 『독립신문』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개화 지식인들이 공통으로 마주한 현실이기도 했다. 서재필 곁에는 윤치호를 비롯하여 조선의 변화를 꿈꾸던 여러 인물이 있었지만, 이들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윤치호는 민영환을 수행하여 러시아로 떠났고, 다른 개화 지식인들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같은 시대의 위기를 바라보고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어떤 나라를 본보기로 삼고 누구와 손잡아야 하는지를 두고 생각과 행보가 달라졌다. 이처럼 개화 지식인들의 연대는 공통된 이상 위에 세워졌으나, 현실의 이해관계와 국제정세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갈라졌다.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서재필이 벼슬길보다 신문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돌아보며 민중의 지지와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은 개혁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기보다 신문을 통해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바꾸는 길을 택했다. 정치 권력에 직접 참여하기보다 계몽운동가로 새롭게 출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이 순수한 계몽의 이상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신문은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매체인 동시에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정부와 개화 관료, 외세가 서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상황에서 신문은 정치적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민중을 계몽하는 공간인 동시에 여러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부딪치는 근대 정치의 전장이었다.
돌이켜 보면 서재필의 귀국 여정 자체가 조선 근대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미국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곧장 돌아오지 못하고 여러 공간을 경유해야 했던 그의 여정은 외세의 영향과 내부의 갈등 속에서 우회하고 굴절하며 나아가야 했던 조선 근대의 역사와도 닮아 있었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 Wikipedia – Philip Jaisohn (서재필)
조선의 근대는 어느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실패와 후퇴, 외세의 개입과 내부 세력의 충돌을 거치며 조금씩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독립신문』 역시 계몽과 자주독립을 밝히는 상징이면서, 권력과 외세의 그림자를 함께 품은 시대적 산물이었다. 자주를 주장하면서도 정부와 외세에 의존해야 했고, 민중 계몽을 내세우면서도 개화 관료들의 정치적 필요와 국제정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독립신문』을 단순히 민족 언론의 출발점으로만 기억해서는 그 역사적 실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근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마주한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 주는 거울이었다. 서재필의 귀국 또한 실패한 개혁가의 귀환인 동시에 새로운 방식의 개혁이 시작되는 장면이었다. 그는 정치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대신 신문을 통해 민중의 의식을 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 신문의 탄생에는 계몽의 이상만이 아니라 정부의 자금, 개화 관료들의 정치적 전략, 외세의 이해관계, 서재필 개인의 신념과 현실적 판단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점에서 『독립신문』은 조선 근대의 희망과 모순을 함께 품고 출발한 ‘근대의 역설’이었다.
독립신문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조선 근대가 얼마나 복잡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근대는 깨끗한 이념의 이름으로만 오지 않았다. 때로는 외세의 군화 소리와 함께 왔고, 때로는 정부 공금과 정치적 계산 속에서 왔으며, 때로는 실패한 개혁가의 고독한 결단 속에서 왔다. 독립신문은 그 모든 모순이 한곳에 모인 상징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신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 근대를 향해 내디딘 불안한 첫걸음이었고, 동시에 그 근대가 얼마나 깊은 역설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적 장면이었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