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훈 칼럼니스트일본이 러일전쟁(1905.9)에 이긴 뒤로는 동아시아 침략국으로, 마침내는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폭주 기관차(Runaway Train)’가 된다. 실로 40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은, 한반도에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병참 기지화되어, 나라가 못 지켜주는 설움과 앞이 안 보이는 터널 속에서 일제의 온갖 수탈과 회유ㆍ협박ㆍ압력을 사실상 개인 ‘홀로’ 감당해야 했고, 전쟁 막바지에는 학도병ㆍ광부ㆍ위안부 강제 차출에 속수무책으로 ‘피눈물’만 흘려야 했다. 얼마 전까지 농노 에도막부 봉건국가가 근대 국가로 ‘급조(急造)’되더니, 돌연 세계만방에 보란 듯 ‘국가적 오만’을 드러내고 무자비한 주변국 침략을 정의(正義)로 삼는, 지구상에서 ‘가장 무모한 전쟁 국가’로 돌변한 것이다. 그 전혼(戰魂)의 타임라인을 따라가 보자.
먼저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해(1905.11) 한반도를 사실상 병탄(倂呑)하더니, 곧이어 1906년,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관동군’을 창설하면서, 러일전쟁에서 얻은 만주에서의 각종 이권과 이를 호위할 방패로 삼는다. 이는 조만간 대륙침략의 정치ㆍ군사적 전진기지가 된다.
수년 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참전한다. 여기서는 ‘최소한의 피로 최대의 불로소득’을 챙긴다. 영일동맹(1902~1923)*1을 구실로 독일에 선전포고한 후, 중국 산둥반도의 독일 이권과 남태평양 독일 영토(마리아나ㆍ마셜ㆍ캐롤라인 제도 등)를 단숨에 빼앗았다. 유럽 열강은 자국 앞마당에서 수천만 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끝내 ‘유럽 파병은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유럽의 공장들이 문 닫자 전 세계의 생필품, 면사, 무기, 배(선박) 등의 폭주하는 주문으로 전쟁 전에는 11억 엔이나 빚진 채무국이 전쟁 후엔 27억 엔의 채권국으로 탈바꿈했다.
‘나리킨(成金, なりきん) 풍자화.당시 유행어 ‘나리킨(成金, なりきん)’*2이 유명하다. 전쟁 특수로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사람을 뜻하며 사회적으로 질시 당해 흔히 ‘졸부’라 불렸다. 당시의 풍자화로 「지폐를 태워 신발 찾는 나리킨」(그림)은 널리 알려졌다. ‘나리킨’이, 어두운 현관에서 하녀를 내려보며 “어떠냐, 이제 밝아졌지.” 하며 신발 찾는다고 촛불 대신 100엔짜리(현 수백만 원) 지폐에 불을 붙여 든 모습이다. 이 시기에 폭발한 ‘나리킨’의 환각은 일본 군부와 국민 가슴에 ‘전쟁은 대박’이라는 엄청난 학습효과를 문신처럼 새겼다.
종전 후에는, 그저 이름뿐인 연합국이었는데, ‘파리 평화회의(1919)’에서 세계 5대 열강에 오르는 외교적 호사도 누린다. 그러나 뒤로는 “피는 유럽이 흘리고 열매는 일본이 챙겼다.”라는 말로 혹평당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국가적ㆍ국민적 오만을 실은 ‘기관차’는 결국 20년 뒤 미국이라는 거함에 덤벼드는 자살적 폭주(태평양전쟁)의 결정적 복선이 된다. 한편, 이 시기에, 독일 이권을 챙긴 것 말고도 중국에 강압적인 요구조건(21조 요구, 1915)*3을 제시하면서 서서히 동아시아의 독점적 패권을 노골화하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제 ‘군부 폭주와 대륙침략’이 전면화(全面化)된다. 마치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정명가도(征明假道)의 한’을 풀려는 격이었다. 먼저, ‘만주의 철도 폭파 사건(1331.9)’을 꾸며내 중국군 탓으로 뒤집어씌운 후 만주 전체를 점령하고 만주 괴뢰국을 설립(1932.3)한다. 이에 국제연맹이 심하게 비난하자, 아예 전격 탈퇴(1933.3)해 고립의 길을 걷는다. 이윽고 1937년 7월, ‘노구교(루거우차오, 蘆溝橋) 사건’*4을 빌미로 중국 본토를 전면 침공하고 난징대학살을 자행한다. 중국 주요 해안 도시는 빠르게 점령했으나 중국의 질긴 항전으로 전쟁은 장기화한다. 그로 인해, 석유ㆍ고무ㆍ철강 등 전쟁 물자가 바닥나자, 나치 독일과 파쇼정권 이탈리아와 ‘3국 동맹(1940.9)’을 맺고 서구 열강과 완전히 등을 돌린다. 드디어 ‘동남아 침략’에 총구를 겨누기 시작한다(1940~1941).
유럽에서 나치가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고, 비시(Vichy) 프랑스 정부(1940.7)가 수립되자 기다렸다는 듯 ‘대동아공영권(大同亞公營圈, 1940.8.1.)’*5을 선포한다. 이른바 “서구 열강을 내쫓고 자립을 위한 대동아 동맹을 만들자”라는 구호였다. 곧이어 비시정부를 압박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ㆍ라오스ㆍ캄보디아) 북부와 남부를 전격 침탈한다(1940.9~1941.7). 장차 인도네시아(네덜란드) ‘석유’와 말레이시아(영국)의 ‘고무’ 확보를 위한 전진기지 확보용이었다. 실로 ‘구호’는 ‘해방자’라 하더니 그저 ‘프랑스와 교대(交代)’한 ‘모순된 침략자’ 행태를 보였다. 대동아공영권의 허구가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다.
마침내 미국이 보다못해 ‘석유 엠바고(수출금지)(1941.8)’로 칼을 빼 들었다. 이는 당시 석유 80~90% 이상을 미국에 의존하던 일본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석유 비축량이 2년 뒤엔 완전히 고갈될 위기에 처했다. 일본 군부는 ‘미 협상+동남아 퇴각’과 ‘선제공격+미 태평양함대 궤멸’이냐의 갈림길에 선다. 일 군부(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6)는 ‘후자의 도박’에 국가의 판돈을 걸고 드디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사전 선전포고 없는 ‘진주만 기습(1941.12)’이었다. 참으로, ‘아군 기습 성공(도라, 도라, 도라; トラㆍトラㆍトラ)’*7이었다. 그러나 ‘미 항공모함 3척’은 안전했고, ‘석유 저장 기지’도 파괴하지 못한 게 화근이 되었다. 미국은 곧 재기한다. 진주만 기습 직후, 일본은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순식간에 싹쓸이했다. 비로소 스승 요시다 쇼인의 ‘대업’을 달성했다고 그의 제자들은 함성을 지르며 승리감에 도취했을 것이다. 그 ‘환희의 방심’이 곧 다가올, 세계 해전(海戰) 역사상 ‘공수(攻守)가 최단시간 극적으로 바뀐’ 최대의 패전을 맞게 된다. 태평양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미드웨이 해전(1942.6)’이었다.
실로 미ㆍ일 양국에 태평양 제해권이 걸린 한판이었다. 그런데, ‘암호해독과 5분간의 기적’이 승패를 갈랐다. 미 해군은 태평양전쟁 3대 승인(勝因)(레이더, 불도저, 암호해독)*8의 하나인 일본군 암호를 사전 해독해 기습계획을 미리 알고 항모를 매복시켰다. 한편, 일본 함대는 미 전함 정보에 대한 혼선으로 전투기 폭탄 탑재에 대한 지휘관 명령이 번복되다가 돌연 구름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미 급강하폭격기의 제물이 된 것이다. 불과 5분 만에 일본이 자랑한 베테랑 주력 항모 3척이 화염에 휩싸였고 뒤이어 남은 1척도 추가 공격에 수장된다. 허망하기 짝이 없는 대패였다. 한꺼번에 일본 국가의 방패, 항모 4척이 수장된 이 패전으로 일본 해군은 치명상을 입는다. 이제 제해권을 잡은 미국의 역공이 시작된다.
태평양에서 일본이 점령한 섬들을 탈환하는 건 본토 공격을 위한 미군의 주요 전략이었다. 여기에서 ‘개구리 도약(Island Hopping) 전술’은 널리 알려졌다. 이른바 주요 거점 섬만 점령하고 나머지는 고립시켜 말려 죽이는 전술이었다. 최초의 중요 전투는 호주 북동쪽 작은 섬 ‘과달카날’ 탈환전(1942.8~1943.2)이었다. 6개월의 육해공 혈전이었다. 일본군은 수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전멸했다. 다음은 괌 북동쪽 사이판 전투(1944.6)였고 여기서도 미ㆍ일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이 흔히 말하는 ‘옥쇄(玉碎, ぎょくさい)’(전원 사망까지 전투) 때문이었다. 사이판이 점령되면서 일본 본토가 B29 폭격기의 사정권에 들었다.
도쿄는 소이탄으로 불바다가 되었고, 자국 패망이 일본 국민 눈에 비로소 잡히기 시작했다. 뒤이어 이오지마(硫黃島)와 오키나와 전투(1945.2~1945.6)에서도 ‘옥쇄’는 기승을 부렸다. 일본군은 굴 안에서 자살공격을 퍼부었고 수만 명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거의 전원이 사망했다. 이제 남은 건 일본 본토 상륙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 전술을 겪으면서, “일본 본토에 상륙하려면 미군 100만 명이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본토 침공’에 대한 미군의 극심한 공포와 부담을 반영한 말로 널리 회자했다. 결국, 미 정치가를 움직인 원폭 투하의 심정적 배경이 된다.
이제 일본에 남은 건 가미카제(神風)(1945)의 ‘자살공격’뿐이었다. 숙련된 조종사도, 비행기도 다 소진되자, 훈련도 안 된 ‘앳된 비행사’들에게 ‘편도비행’으로 미 군함에 돌진하도록 강요했다. 실로 세계 전쟁사에 다시 없는 비인간적인 공격술이요, 일본 군국주의 광기(狂氣)의 터미널이었다. 사실상 ‘남은 가족의 수치(羞恥) 면제’를 담보로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나를, 내 생명을 태평양에 버리라는 거였다. 이런 ‘극단적 막차’를 타게 된 원인 중 하나는 항공공격에 대한 전술상 문제였다. 미군이 ‘항공기는 버려도 비행사는 구해야 한다’라는 거였다면, 일본은 오로지 주군(主君; 天皇)을 위한 ‘사무라이 할복’ 전술이었다. 어찌 숙련 조종사가 제대로 살아남겠는가! 가미카제 전사자가 육·해군 합쳐 4,000~4,600여 명이고 희생자의 80% 이상이 10대 후반~20대 초반이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여기에 조선인 비행사도 18~20여 명으로 확인된다. 출격 전날, 조선인이라며 ‘아리랑’을 부르고, 다음날 출격해 태평양에 산화한 탁경현(24세)*9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다. 일제의 전쟁 폭주의 최후는 애꿎은 식민지 조선의 꽃다운 청년들마저 자살공격에 내몬 것이다. 그런 가미카제의 성공률은 고작 6%였고 대다수 레이더와 기관포 포위망에 걸려 바다로 추락했다. 이제 곧 망할 전장에 아직도 인생에 갈 길 먼 그 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밀어 넣었던 게 일본의 정치가요, 국민이었다! 그리고 고작 몇 달 뒤, 8월 6일(히로시마), 8월 9일(나가사키)에 각각 원폭이 투하돼 기어이 일본은 항복했다.
여기서 참고로 하나 짚고 갈 건, ‘일본 항복 시기’와 ‘한반도 남북분단’의 아이러니다. 소련은 얄타회담(1945.2)에서 독일 항복 후 3개월 뒤 참전을 약속했고, 독일이 1945년 5월 8일 항복했기에 사실상 참전 예정일은 8월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독일보다 항복이 빨랐거나, 일본 군부가 ‘국체보존(일왕제 유지)’을 고집하며 항복을 늦추지만 않았어도, 아니,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던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만 거부하지 않았더라도 ‘소련 참전’과 ‘38선 확정’으로 남북이 갈리는 비극은 없었을 거란 점이다. 물론 원폭도 없었을 것이다. 소련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터진 이틀 뒤, 1945년 8월 8일 오후 11시(모스크바 시각)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 돌입해, 관동군을 격파하고, 8월 11일엔 이미 웅기(선봉)와 나진에 상륙해 함경도 일대를 거침없이 내려왔다. 이에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독점 점령할까 우려한 미국이 급히 제안한 타협안이 ‘38선’이었다. 이게 오늘날 남북분단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어찌 ‘일본의 항복’과 ‘한반도 분단비극’이 무관하랴!
시골 사숙에서 싹튼 요시다 쇼인의 ‘해양팽창론’이, 군국주의로 폭주하다가 결국 도조 히데키 정권에 이르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더니 자국의 산하마저 잿더미로 만들고 막을 내린 셈이다. 일본이 항복한 후, 도쿄 우에노(上野) 길거리에는 하루에도 수명씩 아사자가 보일 만큼 비참했고, 일본은 절망의 나락에 빠졌다. 사필귀정이었다. 그런 일본이 다시 소생하기 시작했다. 실로 대단한 부흥이었다. (5부에 계속)
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동남아 침공과 태평양전쟁 질주(4) 인포그래픽.*1 영일동맹(1902.1.30.): 청일전쟁 후, 만주에 철도 깔고 군대를 주둔시켜 조선과 중국을 집어삼키려는 ‘러시아 남진’을 견제하려 영국이 일본에 제안해 맺은 조약. 2차, 3차에 걸쳐 동맹 적용 범위가 확대되었으나, 가속되는 대륙침략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반대로 ‘4개국 조약(1923.8)’에 의해 공식 폐기된다. 일제는 이 ‘동맹’을 이용, 러시아 견제를 빌미로 한반도 강점과 대륙(만주) 진출을 정당화하고 조선 침탈의 결정적 발판이 되어, 사실상 열강의 승인하에, 조선은 곧 을사늑약(1905.11), 국권피탈(1910.8.29.)로 멸망한다. 조선은 이런 열강의 동태를 전혀 몰랐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일동맹이 깨지고 일본이 점차 고립되자 만주사변ㆍ중일전쟁을 야기, 미국이 견제한 ‘석유 엠바고’에 불복, 태평양전쟁으로 돌진해 패망하면서 조선이 해방된다. 그러니까 영일동맹은 조선 망국의 발판이 되었다가, 폐기되면서 ‘나비효과’로 조선을 해방한 단초가 된 셈이다.
*2 나리킨(なりきん, 成金): 제1차 세계대전의 반사이익으로 벼락부자가 된 신흥부자. 흔히 ‘졸부’로 질시 받았다. 사실상 이 시기 일본 사회를 상징하는 가장 독보적인 키워드일 것이다. 이 말의 어원은, 일본 장기에서 보병인 보(步)가 적진에 들어가 가장 강력한 기물인 ‘금장(金將)’으로 변신하는 규칙에서 유래해 ‘하급 보병이 일약 신분 상승으로 벼락출세했다’라는 의미다.
*3 21조 요구: 1915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을 틈타 중국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려던 외교적 폭거. 중국 총통 원세계(위안스카이)에게 독일의 산둥반도 권익을 일본에 양도, 남만주와 내몽골 동부에서 일본 이권 연장 등과 독소조항인 일본 고문을 고용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은 대부분 수용했지만, 이날을 ‘국치일’로 지정할 만큼 민중의 분노는 들끓었다. 이때부터 미국이 일본 대륙 팽창을 극도로 경계해, 종전 후 영일동맹을 해체(1923) 시키는 계기가 된다. 러시아 남진경계 이유가 사라졌고 한반도 강점도 끝난 마당에 ‘대륙 침략’을 뒷짐 지고 방관할 게 아니라는 거였다.
*4 노구교(루거우차오, 蘆溝橋) 사건: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의문의 기습적인 총성 발생 사건. 베이징 남서쪽 노구교에서 야간 군사작전 중이던 일본군에게 의문의 총성이 날아든 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군과 전면전이 벌어진다. 당초 중국 침략을 노리던 일본 대본영과 관동군은 증원군을 파병하고 8년간 수천만 명이 희생된 중일전쟁(1937~1945)의 막이 오른다.
*5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아시아 해방’이라는 가짜 명분 구호. 1940년 8월 1일, 일제 외무대신(松岡洋石)이 발표한 동남아 침공의 명분 축적용 구호. “서구열강의 침입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고 아시아 각국이 ‘공존공영’, ‘자주독립’을 이룬다.”라는 구호였다. 그러나 일제 침략의 타임라인을 보면 다 허구에 불과했다. 애초 중일전쟁의 합리화 논리로 구상(1938.11, 동아 신질서)했고, 동남아까지 침략이 확장되자 대외명분으로 발전(1940.7, 기본국책요강)시켜 최종 확립된 명칭. 이 선언은 유럽 함락으로 고립된 프랑스ㆍ네덜란드ㆍ영국의 아시아 식민지를 독식하기 위한 명분이었고, 곧 있을 미국과의 정면충돌(태평양전쟁)에 대한 사전 명분 축적 목적이 컸다. 이어서 진주만 기습(1941.12.7.)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일본 자존을 위한 ‘대동아전쟁’이라 명명, 성전(聖戰)이라 자국민을 속였다. 우스운 건, 당시 서양 열강에 식민지였던 나라들(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 필리핀 등)은 처음엔 ‘독립 해방자’라 일본을 반겼더니, 실제론 침략 후, 자원 약탈과 각종 도로ㆍ철도 공사에 자국민을 강제 동원ㆍ혹사함에 곧 허구(虛口)임을 깨닫고 ‘반일 투쟁’으로 즉각 돌아선다. 문제는, 이 구호를 일인 지식인들이 오늘날에도 흔히 공감한다는 점이다.
*6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 일본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자. 1941년 10월 18일 행정 수반인 총리대신이 되어 육군대신, 내무대신, 참모총장을 겸임하면서, 공포정치인 ‘헌병 정치’를 실시해 군부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패전 후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1941년 육군대신 시절, 일본군에게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지 말고, 죽어서 죄의 허물을 남기지 말라.”는 ‘전진훈(戰陣訓)’을 제정해 가미카제와 ‘반자이 어택(만세 공격)’을 정당화했다. 이른바 요시다 쇼인의 광기 어린 ‘황국 사상’이 비인간적인 군대 규율로 만개한 결과였다.
*7 “아군 기습 성공(도라, 도라, 도라; トラㆍトラㆍトラ)!”: 1941년 12월 7일 새벽, 진주만 상공에 제일 먼저 도달해 기습에 성공한 일본 공습대 총대장(淵田美律雄)이 모함(아카기, 赤城)과 연합함대 사령부에 타전한 전문. 1970년 개봉된 미ㆍ일 합작영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일(日) 원문은 “トラㆍトラㆍトラ”였다. 흥미로운 건, 이 암호의 뜻한 바는 “ワレ奇襲二成功セリ(아군 기습에 성공하였음)”인데, “ト”와 “ラ”가 각각 ‘도쓰게키(돌격, 突擊)’와 ‘라이게키(어뢰 공격, 雷擊)’의 첫 글자를 땄다 하여 재미있다. 또 일본어 ‘도라(とら)’는 본시 호랑이(虎)를 뜻하는데, 일 옛 속담, “호랑이는 하루에 천 리를 갔다가, 다시 천 리를 돌아온다(虎は千里行って千里帰る).”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안전 기원의 의미였다. 실로 ‘의미 다중 복합어’였다.
*8 태평양전쟁 3대 승인(勝因): ‘레이더’, ‘불도저’, ‘암호해독’으로서, 군사학계와 현대 전사(戰史) 연구가들이 공인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주특기인 야전 기습, 비행사의 비주얼 전투는 미군 레이더에 무력화된다. 일본군의 망원경 탐색 해전은 미 해군 레이더를 이길 수 없었고, 특히 포탄에 레이더를 장착, 적기 근처만 가도 사전 감지, 자폭해 파편으로 격추하는 소위 ‘VT 신관’은 일본 항공대를 궤멸시켰다. 또 불도저는 일본군이 석 달 걸려야 만들 활주로를 섬 점령 후 며칠도 안 돼 건설, 항공기를 띄운 역군이었다. 더욱이 미 암호 반은 일본 해군의 최고 등급 암호인 ‘JN-25’를 완벽하게 해독했다. 일본 해군 적장 야마모토 이소로쿠 암살(1943.4)은 유명하다. 그의 시찰 일정을 암호 해독해 P-38 라이트닝 전투기를 보내 격추 살해한 것이다. 일본은 종전까지 미 암호해독 정황을 알지 못했다. ‘과학기술력ㆍ시스템’의 중요성을 애초부터 중시한 미국과 ‘정신력’에 승패를 걸었던 일본과의 전쟁은 이미 시작부터 예정된 결과였다.
*9 탁경현: 가미카제 자살공격 단원이었던 조선인 출격병. 당시 24세로 1921년생. 출격 하루 전날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모두 ‘기미가요’를 부르는데, 조선인임을 밝히고 홀로 ‘아리랑’을 불렀다는 것이다. 2005년 10월 9일 자 조선일보에, <호타루와 아리랑>이라는 제하의 동경 특파원 칼럼이 실렸는데, 그는 일본명으론 「미쓰야마 후미히로」였고, 교토약학전문학교(현 교토약학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돼 1945년 5월 11일 출격 후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소개되었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