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훈 칼럼니스트
홍철훈 칼럼니스트330년 전, 안용복(安龍福)이 입었던 ‘가짜 관복’은 그에겐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안용복은 사노비(私奴婢)로 태어나 배 밑바닥에서 살갗이 헤지는 아픔을 견디며 노 젓던 능로군(能櫓軍) 출신 어부(漁夫)였음에도 조선의 사형죄에 해당하는 ‘월경(越境)’에 목숨을 걸고 ‘에도막부(江戶幕府)’ 일본 최고 실력자와 ‘조선 해계(海界)’ 건을 놓고 담판했던 진검 승부사였다. 그리고 국가가 오래 비운 그 섬을 차지하려던 일본인을 몰아내고 마침내 ‘조선 주권’이라는 깃발을 꽂았다. 실로 국가도 못한 걸 해낸 ‘영웅’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마지막’을 아는 자가 없다. 여기선 조선 역사에 ‘4년간(1693.3~1697.2)’ 섬광처럼 등장했다 사라진 ‘거인 안용복’의 모습을 복원해 볼 것이다.
안용복이 일본 ‘막부(幕府)’와 ‘울릉도ㆍ독도’를 걸고 ‘조선 해계’를 마무리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사람됨에 있었다. 안용복의 비범함은 뛰어난 ‘일본어 실력’에서 드러난다. 일본 사료 ‘원록구병자년조선취차일기’(1696)*1속에 녹아있는 그의 언어구사력과 문장력, 논리 전개 방식은 ‘범상한 일본어’가 아니었다. ‘조선의 행정구역(강원도 등)을 언급하며 ‘조선지도’와 일본 ‘고지도(古地圖)’를 내밀어 일본 측의 오류를 조목조목 반박한 기록들이어서다. 평소 높은 한문 해독 실력과 특히 ‘지리(地理)’와 ‘법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고선 감당할 수 없는 일본어 실력이었다. 오죽하면 ‘호키주(伯耆州)(현 돗토리현)’ 태수가 안용복의 항변을 ‘에도막부’에 ‘급보(急報)’로 올렸을까. 항변도 논리정연했지만 ‘막부’에 써 올린 ‘항서’도 절치부심, 절차탁마에 내공이 실린 사실상 ‘외교문서’였다.
어떻게 천출인데 외교관급 이상의 일본어 능력을 갖출 수 있었을까? 당시 안용복이 태어난 부산 동래는 왜관(倭館)이 있어 일본어 학습의 최전선이었다. 필시 영민했을 안용복은 일찍부터 ‘일본어’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에겐 ‘일본어’가 천한 신분에서 벗어날 ‘새 세계의 열쇠’가 아니었을까? 거기엔 일본어 통역관 양성 교재인「첩해신어(捷解新語」,「왜어유해(倭語類解」가 있었고, 왜관 근처에서 잔심부름에 일인을 대하면서 일본 예법과 문장력을 어깨너머 배웠거나 사사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런 안용복이 1693년(숙종 19년) 3월, 울릉도에서 ‘일인(日人)에게 납치된 사건’(1차도일)은 그야말로 천출에 대한 사회적 홀대에 평소 임계점까지 차올랐을 그간의 울분을 일거에 폭발한 ‘기폭제(Trigger)’가 됐을 것이다. 안용복은 ‘호키주(伯耆州)’ 태수 앞에서 ‘강제납치’에 대한 불법성과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 주권’에 대해 거침없는 일본말로 강력히 항의해 일본관리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여기게 했다. 정황 기록에서 이 대목이 특히 주목되는 건, 당시 안용복이 마치 조선의 천한 신분의 옷을 훨훨 벗고 ‘지적 외교관’의 새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처럼 보여서였다. 또 ‘관직 사칭’ 이전의 안용복의 ‘본 모습’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더 흥미를 끄는 건 주위를 압도하는 안용복의 기개(氣槪)였다. 천출임에도 가슴 속에 ‘멍울’로 가득 찼으리란 울분을 냉정하고 당당한 ‘자존심’으로 승화시켜 ‘조선 해계’건을 해결해 보겠다는 강한 ‘성취동기 에너지’로 발현시켰단 점에서다. 더 대단한 건, 그 ‘에너지’를 치기 어린 일회성이 아니라 막부 최고 실력자 ‘관백(關白)(도쿠가와 쓰나요시, 德川綱吉)’으로부터 끝내 울릉도ㆍ독도에 대한 ‘조선 해계’를 인정하는 ‘서계(書契)’*1를 받아낼 때까지 집요하게 쏟아냈다는 점이다. 자기 뜻을 이루었을 때 안용복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필시 천민 능로군 신분을 벗은, 마치 국가를 대표한 ‘외교관’이 된 듯 뿌듯했을 것이다. 안용복이 품었을 그 ‘집념ㆍ성취감ㆍ자부심’이야말로 시대를 넘어 역사를 이어온 ‘인간 성장 동기의 극치’였다.
AI생성 이미지이제 안용복의 ‘2차도일(1695.5)’ 과정을 살펴보자. 이번 ‘도일’은 안용복이 ‘자청해서’ 소위 ‘월경(越境)’과 ‘사칭(詐稱)’에 목숨 걸고 결행한 실로 건곤일척의 ‘도박’이었다. 이때 그가 보여준 고도의 ‘주도면밀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1차도일(1693.5)’ 후 귀국 때 대마도주(소우 요시자네, 宗義眞)*1에게 ‘서계’를 뺏긴 분노, ‘무능한 조정’의 행태에 대한 좌절감, ‘조선 해계’ 건이 ‘일개 어민’으로서 타결 볼 사안이 아니란 점, 또 조선 어민의 생존장인 울릉도 어장을 뺏길 수 없다는 소명의식 등이 그의 활활 타는 가슴 속 용광로에 한데 모여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서계’를 받았기에 ‘재확인’도 가능할 것이란 ‘확신’이 안용복이 믿는 ‘승부수’였을 것이다.
또 다른 안용복의 승부수는 ‘복식(服式)’과 ‘배’였다. ‘검은 관모’, ‘남색 도포’로 위엄을 드러내 일인관리를 사전에 압도했고, 특히 허리에 두른 ‘옥대(玉帶)’는 일본인에겐 정삼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장신구였음을 알았기에 그들이 “이 사람은 조선 국왕의 명을 직접 받고 온 고위 관리(大使)가 틀림없다”라고 단정케 했다. 타고 간 ‘배’도 ‘외교 사절단’처럼 꾸몄다. 안용복이 ‘직함’을 써 높게 매단 ‘깃발’은 일본인에겐 가문의 상징이고 군대의 상장(上將)이라 볼 것이기에 ‘공식적인 항의 방문’으로 지레짐작하고 정중히 접대토록 꾸민 것이다. 일본관리는 그를 ‘대사(大使)’라 칭송했고 연일 쌀밥과 고기와 술을 대접했다고 기록했으니 얼마나 ‘외교관’다운 영특함인가!
그러나 ‘의상’, ‘배’ 만이 아니었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발성, 태도, 눈빛이 남달랐음을 ‘원록구병자년조선취차일기’*2의 기록 행간에서 능히 읽을 수 있다. 그 기록에 “복색화려 기개고앙(服色華麗 氣槪高仰)”이라 안용복을 묘사한 게 백미(白眉)다. 이때 안용복은 사실상 ‘조선국 대사(大使)’가 되어있었다. 안용복이 항의 서한을 호키주 태수에게 전달하면서 “에도 관백(關白)에게 즉시 보고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런 기세에 눌려 호키주 태수는 에도 막부에 ‘급보’했다. 막부는 “이미 1차 때 내린 도해 금지령이 맞으니, 일본 어민들을 단속하라”는 명령을 호키주 태수에게 하달한다.
안용복이 ‘2차도일(1696.5)’해서 겨우 2개월도 채 안 된 시점이었으니(1696.06-07) 그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리고 이듬해 1697년 2월, ‘서계’를 빼앗았던 그 대마도주(소우 요시자네, 宗義眞)가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에도 명령’을 조선에 공식 전달함으로써 ‘조선 해계’ 건이 비로소 종지부를 찍는다.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닻을 올린 ‘1차도일’ 때 에도막부로부터 받은 ‘서계’는 안용복에겐 천한 자신의 존재감을 국가적 차원에서 승화시킨 쾌거였고, ‘2차도일’로 ‘조선 해계’를 매듭지었을 땐 그 ‘역사적 성취감’에 굳은살 박인 두 손을 내려다보며 ‘비장(秘藏)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나 더 주목할 건, 일인 관료가 일본에 남기를 권했음에도 안용복은 뿌리치고 귀국한 점이다. 왜일까? 국가도 못한 ‘역사적 쾌거’를 천출인 자신의 손으로 해냈다는 높은 ‘자부심’에서였을 것이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역사를 마주한 인물들은 늘 그랬다. 그러기에 ‘실록’ 어디에도 ‘목숨을 구걸’했단 기록이 없다. 그는 나갈 때 필시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바다 천인(賤人)’을 대하는 조선 양반의 행태를 일찍이 봐왔을 터여서다. 그러기에 자신을 죽이려는 조국(祖國)의 국문장(鞫問場)에서 비굴하지 않았다. 되레 ‘역사의 정당성’을 증언했다. 이미 안용복은 시대를 앞선 ‘선각자’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함께 도일해 사형위기에 처한 10여 명의 동료를 구하려 ‘주모자’가 자신임을 분명히 했다. 의리의 사나이였다.
안용복은 ‘말하는 도구’에 불과했던 사노비였고 능로군 출신 어부였지만 그 천대를 견디고 ‘왜관(倭館)’이라는 틈새로 세상을 읽고 가슴속 울분을 ‘높은 기개와 냉정한 자존심’으로 승화시킨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일개 어부였지만 에도막부의 최고 실권자 관백(關白)에 맞섰던 담대함을 지녔고 신념에 투철한 사실상 ‘조선의 외교관’이었다. 더욱이 나라마저 버려둔 조선 어민의 생존장인 ‘울릉도 어장’을 왜인에게 뺏길 수 없다는 확고한 소명의식을 지닌 선각자(先覺者)였다.
안용복은 실로 ‘가짜 관복을 입은 진짜 영웅’이었다. 일본은 그를 ‘인재’로 보았으나 조선은 그를 ‘죄인’으로 보았다. 다만, 안용복이 받은 ‘유배’형은 당시 천민에겐 없던 ‘정치적 형벌’로 그가 세운 공이 ‘국가적 차원의 외교적 성과’였음을 실록은 역설적으로 증거 한다.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에 깊이 꽂은 조선 주권의 ‘깃발’은 330년이 지나 ‘태극기’가 되어 동해 저 먼바다의 ‘희원(希願)’을 실어 오늘도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이제 안용복이 꽂았던 ‘주권 깃발’의 현대적 의미를 짚어보고 계속해서 ‘바다의 눈’으로 ‘독도’를 살펴보자. (3편에 계속)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