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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막부와 메이지 천황제로의 갈등(2)
  • 기사등록 2026-09-22 11:59:06
  • 기사수정 2026-09-23 07:4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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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훈 칼럼니스트미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 출현(1853)으로 250년간 이어져 온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전환됐다(1868). 그 16년 동안, 일본은 그야말로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의 갈등(정치투쟁)’이요, ‘피할 수 없는 유혈 충돌(내전)’이고, 또 ‘국멸(國滅)을 막기 위한 이성적 양보(대타협)’가 마치 급회전하는 톱니바퀴가 맞물린 것처럼 한 편의 대하 드라마였다. 그 사건들을 살펴볼 때마다 ‘조선 멸망’과 얽힌 역사의 서글픔이 타임라인 곳곳에 드러난다.


메이지 유신(1868)의 서사(敍事)인 핵심적인 5대 사건의 타임라인을 따라가 보자. 먼저, 1866년 ‘삿초 동맹(薩長同盟)’이다. 당시 막부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두 세력인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1과 ‘조슈 번(현 야마구치)’*2(그림)이 하나로 동맹을 맺은 사건이다. 신구(新舊)의 시대적 갈등을 봉합하는 대타협의 서막이었다. 흥미로운 건, 본시 두 ‘번(縣)’이 혈전(血戰)의 원수지간이었는데, ‘에도 막부’라는 거대한 벽을 넘으려면 이 둘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걸 깨달은 도사번 출신 천재 낭인(浪人)의 중계 덕이었단 점이다. 오늘날 희대의 영웅으로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3’였다. 그는 조수 번은 막부와 싸울 ‘근대 무기’가 부족했고, 사쓰마 번은 식량과 정치적 명분(온건에서 강경으로 바꿀)이 필요했음을 꿰뚫어 보고 두 번(藩)이 상호 이를 보완하도록 나서 마침내 ‘비밀 동맹’을 맺게 한다. 드디어 사쓰마 번은 무기를, 조수 번은 식량을 상호 제공함으로써 막부 타도의 실질적인 엔진이 된다. 실로 한 낭인의 중계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어 일본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꾼다.


삿초 동맹도.다음은, 1867년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다. 삿초 동맹의 거센 압박에 몰린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그해 10월, 쇼군의 통치권(정치 권력)을 천황에게 ‘자진 반납’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정치가 막다른 골목에 다가서 이대로 가다간 대규모 내전이 터져 나라가 갈가리 찢기고, 그 틈에 서양 열강(영국ㆍ프랑스)이 일본을 집어삼킬 거라 보고 내린 대결단이다. 그러나 내심 껍데기 권력은 천황에게 넘겨주되, 실질적인 영토와 행정력은 도쿠가와 가문이 계속 쥐고 새로운 의회 정치의 수장이 되겠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타협안이었다. 즉, ‘칼’ 대신 ‘투표와 의회’라는 새로운 ‘문명의 틀’ 안에서 최고권력을 재독점하려는 묘수였다. 


그 통에, 1868년 도바ㆍ후시미(鳥羽ㆍ伏見) 전투로 알려진 내전이 시작된다. 막부를 완전히 없애려던 사쓰마와 조슈의 강경파는 쇼군 요시노부의 이런 ‘합법적 암산’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들은 쿠데타로 천황 중심의 새 정부 수립을 선언하는 ‘왕정복고의 대호령(大号令)’을 내리고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와 관직을 박탈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구 막부 군대와 신 정부군이 교토 근교에서 충격적인 유혈 충돌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향후 일본 최대의 내전인 ‘보신 전쟁(戊辰 戰爭, 1868~1869)’의 시작이 된다.


같은 해 메이지 정부 수립으로 가는 ‘신구(新舊) 대타협’은 실로 눈을 비비게 만든다. 보신 전쟁의 승기를 잡은 신 정부군은 구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현 도쿄)로 진격해 총공격을 감행하려 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만일 에도성에서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당시 인구 100만 명이 사는 거대 도시가 잿더미가 되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을 건 뻔했다. 또 서양 열강이 개입할 절호의 빌미도 제공했을 것이다. 놀랄만한 건, 이때 신정부군 총사령관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구 막부 측을 대표하는 지식인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극비리 회동, 막부는 최고 권력자 ‘요시노부’의 은퇴와 무장해제를, 신 정부군은 총공격을 중단하기로 합의한다. 그 결과, 소위 ‘무혈개성(無血開城)’으로 에도는 전화(戰禍)를 피하고 수도로 보존할 수 있게 된다. 내란의 순간 이루어진 ‘지식인의 대타협’이었다. 


이제 에도성은 열렸다. 그러나 이에 불복한 구 막부의 저항은 아직 있었다. 해군 수장(榎本武揚)이 막부의 최신 군함을 이끌고 북쪽 홋카이도로 도망쳐 ‘에조 공화국(홋카이도 공화국, 蝦夷共和國)’이라는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 저항한 것이다. 결국, 1869년 하코다테의 최후 전투에서 항복함으로써 ‘보신 전쟁’은 완전히 종식된다. 이로써 일본 전역이 메이지 천황의 통치하에 ‘하나로’ 통일되었다. 서로 총구를 겨누다 국가 파멸의 위기에서 멈춘 ‘사이고 다카모리(신정부)’와 쓰러지는 막부와 가문의 안위보다 국가의 생존과 근대화를 내다본 혜안의 정치가 ‘가쓰 가이슈(막부)’는 오늘날에도 ‘국민적 대인(大人)’으로 칭송받고 있다. 


'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막부와 메이지 천황제로의 갈등(2)' 인포그래픽.아이러니한 건, 일본이 이렇게 치열하게 ‘내비(內備)’했던 건 서양 열강으로부터 다시는 ‘흑선(黑船)의 굴욕’을 안 당하겠다는 ‘공포심’의 발로였는데, 그 극복을 위해 애써 키운 국력을 자존(自存)에 머물고 주변국을 돕기는커녕, 곧이어 조선에 ‘똑같은 괴물(운양호)’을 안기고(강화도 조약, 1876) 조선 병탄과 대륙 제패로 뻗어갔다 함이다. 사실상 근대 국가에 갓 입성한 일본의 ‘오만’이 드러나기 시작한 셈이다. 실로 일본 패망의 씨앗은 이때부터 싹텄다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일본의 해양관이 ‘공존과 상생의 바다’가 아닌 ‘약탈과 정복의 바다’로 변모하면서다. 이제 국가의 방향키는 조선을 향한 군국주의자의 손으로 점차 넘어간다. 마침내 그간 숙제처럼 유예했던 소위 ‘정한론(征韓論)*4’이 기어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에 이어 조선 침략에의 탄환을 재장전한 것이다. 


조선 병탄은 오직 시간문제가 되었다. 해 저문 대한제국은 장차 대륙진출을 위한 일본의 병참기지로 서서히 전락해, 조만간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질 청일ㆍ러일전쟁을 남 일 보듯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3부에 계속)


*1사쓰마 번(薩摩藩, 현 가고시마): 일찍부터 ‘류큐 왕국’과의 우회 밀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쌓았다. 즉, 1609년 사쓰마 번은, 독단으로 류큐 왕국(현 오키나와)을 침공해 복속시키고, 청과 류큐 왕국과의 조공무역을 막후 조정해 막대한 부를 챙겨, 다른 번(藩)보다 부유했고 일찍부터 막부 몰래 서양의 근대식 무기와 기술을 사들여 막부에 대적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2조슈 번(長州藩, 현 야마구치): 1830년대부터 강력한 재정개혁을 단행해 번의 빚을 탕감하고 종이ㆍ밀랍ㆍ소금ㆍ쌀 등 특산물의 전매제를 강화했고 ‘양안 화물선 금융업’이라는 일종의 항만 물류ㆍ금융업을 운영해 엄청난 비자금을 축적했다. 막부에 한 맺힌 역사가 있어 늘 적대적이었다. 즉,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해(세키가하라 전투) 변방으로 쫓겨난 후, 오랜 차별과 감봉을 당해 원한이 사무쳤다. 심지어 새해 첫날엔, “올해는 막부를 토벌합니까?”하고 묻고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라고 답하는 의식이 250년간 이어졌다 하니, 끈질긴 적개심과 독립성이 강했다.

*3’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 막부 말기의 도사 번 출신 낭인(浪人)으로 타도 막부를 위한 삿초 동맹의 핵심역할을 했다. 그러나 공식문서(막부)에는 거의 그의 기록이 없어, ‘역사의 기록보다 시대의 신화’로 살아남은 인물인 것 같다. 그가 원수지간의 두 ‘번(藩)’을 화해시킬 수 있었던 건 무력이 아닌 ‘바다를 보는 시야’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안에서 곪기 전에 밖(바다)으로 눈을 돌려야 함을 꿰뚫어 본 선구자였던 셈이다. 그가 일본 전역의 항구를 돌아다니며 얻은 해양지식이 좁은 밀실에 갇혀 있던 사무라이들의 사고를 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정한론(征韓論): 에도 막부 말기 조선 정복론.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혁명가였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감옥에서 저술한 《유수록(幽囚錄)(1854)》에서 주장했다. 사쓰마 번의 류큐 지배와 대외 확장이 사상적 영감이 되었고, ‘아(亞)제국주의적 보상‘이 이론 배경에 깔려있다. 이는, ‘서양에 당한 손해를 아시아에서 메우자’가 핵심 사상으로, 훗날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확장된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임진왜란 때 조선 정벌했던 위업을 다시 계승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한 게 돋보인다. 임진왜란을 보는 ‘선각자적 일본 지식인들의 시각’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갖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향수와 요시다 쇼인을 ‘메이지유신의 영웅’이라 봄으로써 ‘조선 병탄’의 정당성을 은연중 국민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실로 대한민국과의 선린 관점에서 ‘일본의 비극’일 것이다. 한편, 그의 사상엔, ‘러시아에 대한 공포’도 깔려있다. 러시아 남하는 일본 안보 위협이므로 한반도와 만주를 장악해 군사적 방파제(buffer zone)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조선 병탄’과 러에 대한 ‘안보적 강박 사상’은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한 메이지 정부의 핵심 요인이 된 제자들(曾禰荒助, 寺内正毅, 桂太郎 등)에게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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