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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검은 배(黑船) 충격과 해방(海防) 각성(1)
  • 기사등록 2026-09-14 20:24:53
  • 기사수정 2026-09-14 20: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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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검은 배(黑船) 충격과 해방(海防) 각성(1) 인포그래픽1.필자의 ‘바다의 타임라인(time line)’ 다섯 번째로, ‘일본’을 올린다. 대한민국과 역사적ㆍ지정학적인 운명적 관계로, 때론 ‘왜구’로 적개심의 대상이었고, ‘해양강국’이 되었을 땐 우리의 생사여탈을 쥐고 흔들었던 나라였다. 대륙침략 때는, 한반도가 때론 그 진출을 가로막는 장벽이었고 때론 교두보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고혈을 짜내 갔다. 실로 역사적으로 애정이 생기기 어려운 나라였다. 그러나 대일 피해의식의 근원은, 정작 일본을 모르고 그저 “왜놈, 왜놈” 하면서 비웃고 무시하기만 했던 측면도 클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좀 더 다가가 ‘일본’을 깊게 살펴봄으로써 더는 국난 재발을 막고 양국 발전에 피차 도움 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이번 글 취지를 맞추려 했다. 


일본을 ‘왜(倭)’라 비하하던 조선이 바다를 ‘장벽’으로만 볼 때, 일본은 ‘신문명의 통로’이자 그 ‘고속도로’로 삼았다. 조선이 바다를 통해 찾아온 뜻밖의 행운, 하멜*1을 표류자(1653, 효종 4년)로 가두고 고립을 자초할 때, 일본은 나가사키 좁은 인공섬 ‘데지마(出島)(1634)*2’라는 창구를 현미경 삼아 이미 바다 너머 ‘세계 판도’를 읽고 있었다. 이 ‘해양관(海洋觀)’의 차이가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극적인 사건은, 1853년 미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이끄는 군함(흑선, 黑船, くろまる)의 출현이다. 통상하자는 거였다. 일본 연안, 가나가와(神奈川) 요코스카 앞바다(浦賀)였는데, 여기는 에도 만(현 도쿄만)에 진입하는 목덜미 같은 요충지였다. 당시의 실권자인 에도 막부(幕府)의 최고 책임자(阿部正弘)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 독단적 결정을 못 하고, 전국 다이묘(영주)와 천황에게 자문했다. 이는 에도 막부가 절대 권력의 한계를 자인한 꼴이 돼, 향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1868)’으로 가는 권력 재편의 도화선이 된다. 


주목할 건, 이런 급박한 와중에도 막부는 청나라가 아편전쟁(1840)에 당한 꼴을 직시했다는 점이다. 그래 이듬해 개항을 수용하는 조약(가나가와 조약, 1854)을 맺었다. 실로 놀라운 건, 이 조약 이후 막부의 신속한 대응조치다. 즉시 대형 선박 건조 금지령을 해제하고, 에도 만(동경만)을 지키기 위한 인공포대 섬인 ‘오다이바(お台場)’(현 도쿄여행에 필수 코스인 포대 유적지)를 긴급히 설치하고, 나가사키에는 ‘해군전습소’를 설치(1855)했다. 이건 단순 항해교습소가 아니었다. 실로 지구물리학적인 해양과학의 각성이었다. 그러니까 종래 바다를 그저 ‘항로’로만 보던 시각을 ‘지배의 영역’으로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 주변 해역은 물론 한반도 주변 해역까지 일본 수ㆍ해양학자들의 연구현장으로 변모했다. 1900년대 초에는 오늘날까지 참고할 만한 ‘동해의 심층연구’까지 그들의 연구영역을 확대했다. 영국의 19세기 전성기 때처럼 해양을 ‘과학의 영역’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셈이다. 이렇게 축적된 해양지식은 훗날 청일ㆍ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밑거름이 된다. 첫 대학인 ‘동경(東京)대학’도 건립된다(1877.4). 서양의 대학 학제, 시스템 등을 그대로 본떴다. 실로 메이지 유신 9년 만이다! 이미 ‘미 건국과정’에서 지적했었듯, 1620년 Mayflower 호를 타고 미대륙에 상륙한 청도교들이 16년만인 1636년에 美 최초의 대학, ‘하버드 대학’을 설립한 바와 닮은꼴이다. 


더욱 놀라운 건, 개항 10년 남짓해, 1865년 요코스카에 ‘해양 산업의 심장’인 ‘조선소’*3를 착공했다. 장차 여기서 일본 군함을 자력 건조하고 수리해 해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 완성은 1871 메이지 유신 4년째였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외세대응’이었다. 실로 통일적 국론의 결과였다!  


그러니까 ‘메이지 유신’의 폭발적인 성공은 막부의 바다로 열린 개방된 토양 위에 뿌려진 씨앗이었다. ‘국가 근대화’가 ‘불쑥’ 솟아난 게 아니라 나가사키 데지마(出島)를 통해 200년간 쌓여온 난학(蘭學, Rangaku)이 그 토양이 되었다. 제한적이었던 서양과의 교류의 창(窓)이 국가 위기가 닥치자 전면적 교류ㆍ문물확대로 활짝 개방된 셈이다.  


또 에도 막부 동안 정교하게 발달한 ‘관료제 국가 시스템’도 주효했다. 그 행정력은 전국적이어서, 세금징수, 인적관리 등이 이미 최고수준이었다. ‘페리의 공포(Existential Dread)’가 엄습하자, 이 관료조직은 즉각 인재를 발굴해 그 인적자원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실로 ‘조직의 유연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은, ‘서양은 야만인’이라며 배척할 때(尉正斥邪), 막부는, 지금은 열강에 이길 수 없으니 저들의 과학을 빌리자는 ‘현실적ㆍ유연한 태도’를 수용했다. 실로 ‘메이지 유신’으로 빠른 근대화 국가로 입성한 건, 에도 막부가 멸망을 각오하고 닦아놓은 ‘강력한 디딤돌’ 덕분이었다. 실로 제한적이라도, ‘바다를 개방’해 늘 열어뒀던 막부의 ‘해양관’ 덕일 것이다.  


이윽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1871년 전국적으로 시행된 ‘폐번치현(廢藩置縣)’은 국가 행정조직의 혁명이었다. 수백 개의 지방 영주(다이묘)가 다스리던 땅(번, 藩)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현(縣)으로 바꾼 것이다. 중앙집권화의 정점으로서 메이지 유신의 실질적인 완성이자 일본이 근대 국가로 거듭난 가장 핵심적 사건이다. 이로써 전국 어디서든 세금을 걷고, 징병제(1873)로 군대를 만드는 ‘국가 총동원체제’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장차 바다를 넘기 위해 우선 ‘섬 안의 힘’을 하나로 모은 고도의 전략적 정책이었다. 


1871~1873년, 외국(구미) 시찰단을 파견한 것도 일대 사건이다. 실로 일본 근대화의 핵심 로드맵으로, 미국과 유럽을 돌며 서구의 근대화 모델을 흡수해 온 사건인 셈이다. 메이지 정부 핵심 수뇌부 5 대신과 정식사절단, 유학생을 포함해 총 100여 명으로 구성된 소위 ‘이와쿠라(岩倉) 사절단’*4이다. 여기에 훗날 안중근에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수뇌부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찰결과, 단순히 기술 흉내가 아니라, 영국ㆍ독일의 ‘입헌군주제’ㆍ‘공장제도’ㆍ‘금융시스템’을 본 떠 일본판으로 이식했다. 무엇보다 주목된 건, ‘강대국은 모두 바다를 제어한다’는 걸 깨닫고 일본의 국가 총력을 오로지 ‘해군 증강’에 집중한 점이다.  


메이지 유신 4년, 에도 막부 때 재무장관이었던 오쿠리 다다마사(小栗忠順)*3의 선견지명으로 개시된 ‘요코스카 조선소’가 이윽고 완성된다(1871). 이제 서양 기술자들에게 의존하던 단계를 벗어나 일인 기술자가 직접 설계하고 건조하는 ‘기술 자립’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역사적 첫 군함(淸輝)이 5년 뒤 1876년(메이지 9년)에 건조된다. 실로 일본의 ‘근대화 속도전’에 그저 탄복할 뿐이다! 결국, 이 조선(造船) 기술이 조만간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치르는 해군력의 대들보가 된다.  


이제 260년의 에도 막부가 메이지 천황제로 바뀌면서 겪는 내부 진통과 그 핵심 사건들을 살펴보자. (2부에 계속) 

 

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검은 배(黑船) 충격과 해방(海防) 각성(1) 인포그래픽2.*1하멜(Hendrick Hamel, 1630~1692): 1653년(효종 4년), 제주도 남쪽(서귀포)에 난파된 네덜란드 무역선 선원 64명 중 1인. 13년간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탈출에 성공, 귀국해《하멜표류기, 1668년》를 저술했다. 이 책은 조선을 세계에 최초로 소개한 책자가 되었으나, 역설적으로, 하멜과 억류됐던 많은 네덜란드인이 조선에 영향을 미친 건 거의 없었다. 하멜은 거의 14년 동안 군역ㆍ태형(笞刑)ㆍ유형(流刑)ㆍ구걸의 모진 풍상을 겪었을 뿐 서양세계의 발전상을 조선에 거의 전달하지 못했다. 조선에 이들은 그저 처리 곤란한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일본이 ‘나가사키’에 ‘올란도 촌(村, 데지마)’을 형성해 서양과의 문물 교환의 창구로 삼았던 것과 대조된다. 

*2데지마(出島): 에도 막부가 나가사키 내 만에 1634년~1636년에 완공한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 포르투칼인(나중엔 네덜란드인)을 한곳에 가두어 포교를 막고 감시하기 위함. 에도시대 일본이 서양과 교류한 유일한 해상 통로였음. 바다(만)인 곳을 메워 만든 100% 인공섬으로서, 완공 후, 다리를 하나만 만들어 경비초소를 두고 육지와의 왕래를 통제했음. 특히 일반여성 출입은 엄격히 금했다. 또 성경책, 십자가 등 물품 반입이나 섬 내에서 찬송가 부르는 것도 금지했다. 다만, 섬 내에서 호화로운 거주시설, 최고급 와인, 서양식 식사는 가능했고, 신선한 고기와 우유 제공을 위한 가축사육과 심지어 네덜란드식 정원, 당구장 건립도 허용했다. 이후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의학, 과학, 천문학 등 전반적인 서양 지식이 일본에 전파되었고, 이를 소위 ‘난학(蘭學)’이라 하였다. 이 ‘데지마’는 향후 수백 년간 에도 막부가 제한적이나마 서양세계를 모니터링하는 공식 창구가 되었다. 참고로, 일본 전국시대 판도를 바꾼 조총이 일본에 처음 소개된 것은 1543년 8월, 포르투갈 상인이 규슈 남쪽 다네가섬(種子島)에 표류하면서 전해졌다. 

*3요코스카(橫須賀) 조선소: 1871년 일본 최초로 완성된 근대식 조선소. 5년 뒤 일본 최초의 전함(목조) ‘세이키(淸輝)’함이 준공된다. 이로써 요코스카는 명실상부한 ‘제국 해군의 산실’, ‘해양 산업의 심장’이 된다. 놀랍게도, 1호 도크는 현재까지도 주일미군 기지 내에서 현역으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건설 총책임자이자 에도 막부의 재무장관이었던 ‘오쿠리 다다마사(小栗忠順)’의 일화는 유명하다. 주변에서, 곧 망할 막부가 엄청난 예산 소요의 조선소 건설을 왜 추진하냐고 비난하자, 그는, “막부가 망해도 이 조선소는 남는다. 무너지는 막부의 기와집을 파는 것보다 차세대 국가를 위해 튼튼한 ‘대장간’ 하나를 남기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다.”라고 강행했다 한다.  

*4이와쿠라(岩倉) 사절단: 특명 대신으로 임명된 메이지 정부 외무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중심으로, 1871년 12월부터 1년 10개월에 걸쳐, 미국, 유럽 각국을 돌았던 대규모시찰단. 참가한 수뇌부 5 대신은 이와쿠라 도모미를 포함해, ‘메이지 유신’의 핵심이었던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구치 마스카였고, 사절단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으로 총 107인으로 구성되었다. 실로 고위급 대규모 국가 대표단이었다. 애초 미국과 불평등 조약이었던 ‘가나가와 조약(1854)’의 개정을 목표로 삼았으나, 시찰 도중에 ‘조약 개정’보다 각국에서의 ‘유학’이 주목적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서양 문물에 격렬한 쇼크를 받았다. 흥미로운 건, 이 사절단이 귀국 후, 이전까지 ‘정한론(征韓論)(2부 참조)’ 찬반에 극심했던 내분 정국을 가라앉혔다는 점이다. 시찰 전엔 ‘정한론’이 대세였는데, 시찰 후, ‘조선을 적으로 돌리면 청(淸)과도 적’이 되고, ‘군함도 수송선도 불충분해 해전 승리를 장담 못 한다’는 논리에서였다. 또 청에 이겼다 하더라도 군비에 걸맞은 국익이 없다고 보았다. 요컨대, 정한론은 살려두되 후일에 도모하자는 ‘유예론’이었을 뿐, 조선 병탄은 그저 시간문제인 셈이었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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