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제신문 편집국
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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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2장. 임오군란은 정말 '군란'이었는가.
④ 누가 이름을 결정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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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단지 사건을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다.
역사는 사건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힘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이미 누군가가 선택한 언어를 통과한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누가 이름을 결정했는가.”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 사건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어떤 시대에는 ‘혁명’이 되고, 다른 시대에는 ‘폭동’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의병’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란군’이 된다. 결국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그 시선을 결정하는 것은 대개 권력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방데(Vendée) 반란’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혁명 정부는 1793년 프랑스 서부 방데 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무장 저항을 ‘반혁명 반란’ 혹은 ‘왕당파 폭동’으로 규정하였다. 혁명 정부의 시선에서 이들은 공화국 질서를 위협하는 반동 세력이었다. 따라서 공식 기록 속에서 방데 주민들은 혁명을 거부한 위험한 폭도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당시 방데 지역 주민들은 급격한 종교 탄압과 강제 징병, 중앙 정부의 급진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들의 봉기는 단순한 왕당파 폭동이라기보다 지역 사회와 종교 공동체를 지키려는 저항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 정부는 이를 어디까지나 ‘반란’으로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혁명 권력 입장에서 무장 저항은 새로운 공화국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결국 사건은 오랫동안 ‘반혁명 폭동’이라는 이름 속에서 기억되었다. 하지만 이후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단순한 반동 폭동이 아니라 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국가 폭력과 지역 공동체 충돌의 사례로 재해석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은 오늘날 미국에서는 독립운동의 상징처럼 기억된다. 그러나 당시 영국 정부 입장에서 그것은 명백한 불법 폭동이었다. 영국은 이를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질서를 파괴한 난동 행위로 규정하였다. 실제로 차를 바다에 던진 행동은 사유재산 파괴였고, 영국 정부는 강경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이 사건이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저항의 상징으로 재구성되었다. 같은 사건이 영국의 시선에서는 ‘폭동’이었고, 미국의 시선에서는 ‘독립운동’이 된 것이다.
러시아 제국 말기의 ‘푸가초프의 난’ 역시 흥미로운 사례다.
18세기 러시아 농민과 카자크 세력을 이끌었던 예멜리안 푸가초프의 봉기는 오랫동안 러시아 제국 기록 속에서 단순한 농민 반란으로 규정되었다. 황실 권력 입장에서 그는 국가 질서를 위협한 위험한 반란 지도자였다. 그러나 후대 일부 역사 연구에서는 푸가초프 봉기를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농노제와 제국 권력 구조에 대한 민중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같은 사건이라도 권력의 시선에서는 ‘난(亂)’이 되고, 민중의 시선에서는 ‘저항’이 되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진승·오광의 봉기는 중국 최초의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나라 조정 입장에서 이들은 국가 질서를 뒤흔든 역적이었다. 반면 후대 역사에서는 폭정에 저항한 민중 봉기로 재평가되었다. 같은 사건이 어떤 시대에는 ‘반란’이 되고, 어떤 시대에는 ‘민중 저항’이 되는 것이다.
조선에서도 이름은 늘 권력과 함께 움직였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 모두 실제로 왕위에 올랐던 군주였지만, 폐위 이후에는 ‘조(祖)’나 ‘종(宗)’이라는 왕호를 받지 못하고 단지 ‘군(君)’으로 격하되었다. 여기서 ‘군’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상적인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특히 광해군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건과 실리 외교에서 상당한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었음에도, 인조반정 이후 공식 역사 속에서는 오랫동안 폭군 이미지로 기억되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인조반정 세력은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권력은 이전 권력을 부정적으로 재구성하였고, 그 결과 광해는 ‘광해군’이 되었다. 결국 왕호조차도 권력이 결정하는 이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역시 언어를 매우 전략적으로 사용하였다.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일본은 대한제국 침탈을 단순한 침략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보호’와 ‘개혁’이라는 표현을 적극 사용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 식민지화 역시 ‘한일합방(日韓合邦)’이라는 용어로 포장하였다. 그러나 ‘합방’이라는 단어는 마치 두 나라가 대등한 위치에서 자발적으로 결합한 것처럼 들리게 만든다. 실제 현실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흡수한 구조에 가까웠다. 즉 이름은 현실을 숨기는 장막이 되기도 했다.
「누가 이름을 결정했는가」그림 이미지왜 권력은 이렇게 이름에 집착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은 사건보다 이름을 먼저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정의와 변화, 민중의 열망을 떠올린다. 반면 ‘폭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질서와 파괴를 먼저 연상한다. 즉 이름은 사건에 대한 감정과 판단을 먼저 결정한다. 권력은 바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 속 권력은 언제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름을 선택하려 했다.
고대 로마에서도 정치적으로 제거된 황제나 권력자의 이름은 비문에서 지워졌고, 초상은 파괴되었다. 이를 ‘담나티오 메모리아(Damnatio Memoriae)’라고 부른다. 존재 자체를 역사 속에서 삭제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기억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행위였다.
스탈린 시대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으로 숙청된 인물들은 사진 속에서도 사라졌다. 실제로 스탈린과 함께 찍힌 혁명 지도자 트로츠키가 사진에서 삭제된 사례는 매우 유명하다. 권력은 단지 사람을 제거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려 했다.
결국 역사 속 이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누가 이름을 결정했는가에 따라 사건의 의미는 달라지고, 기억의 방향 역시 달라진다. 그래서 역사 연구는 단순히 과거 사건을 나열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왜 특정한 이름이 선택되었는지를 묻는 작업에 가깝다.
왜 ‘군란’인가.
왜 ‘폭동’인가.
왜 ‘합방’인가.
왜 ‘광해군’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기록 뒤에 숨어 있던 권력의 구조를 보기 시작한다.
역사는 흔히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는 승자가 붙인 이름 속에서 기억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깨닫게 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기억과 해석의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보다 누가 이름을 붙였는가 하는 문제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