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제신문 편집국
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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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5장. 민비인가, 명성황후인가
② 민비’라는 식민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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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인물을 부를 때 단순히 이름만 말하지 않는다.
그 이름 속에는 시대의 시선과 권력의 의도, 그리고 기억의 방향이 함께 담긴다. 그래서 역사 속 호칭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정치적 언어가 된다. 누군가를 어떻게 부르느냐는 결국 그 인물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말기 역사에서 이러한 호칭의 정치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민비(閔妃)”라는 표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민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불쾌감부터 느낀다. 그 이유는 이 표현이 오랫동안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사관 속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조선 왕조 자체를 낡고 무능한 권력으로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 전략을 사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명성황후 역시 의도적으로 황후의 위엄보다는 특정 가문의 여성 정도로 축소되어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조선 왕실에서 왕비는 생전에는 ‘중전’ 혹은 ‘왕비’로 불렸다. 그리고 사후에는 시호와 함께 공식 호칭이 부여되었다. 명성황후 역시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후 체제 속에서 공식적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명성황후’는 사후에 확정된 공식 호칭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어떤 호칭이 맞느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특정 시대가 특정 호칭만을 강조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일본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조차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는 표현으로 불렀다. 그러나 ‘사변’이라는 용어는 본래 대규모 침략이나 조직적 폭력을 희석시키는 성격을 가진 표현이다. 실제로 일본은 자국의 침략과 무력 개입을 종종 ‘사변’이라는 이름으로 축소해 왔다. 따라서 명성황후 살해사건을 ‘을미사변’이라 부르는 방식 역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식민주의적 언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일본 세력은 명성황후가 친러 노선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 전략을 견제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1895년 일본 낭인과 군인들은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계획적으로 살해하였다. 그런데 이후 일본 측 기록과 식민지 시기의 일부 서술에서는 ‘명성황후’보다는 ‘민비’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후라는 국가적 권위를 지우고, 단지 민씨 가문의 한 여성 정도로 축소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언어였다. 결국 호칭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권력이 기억을 통제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얼굴 없는 황후, 남겨진 네 장의 사진. 그러나 아직도 어느 사진이 진짜인지 모른다.
실제로 식민지 권력은 늘 호칭을 통해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려 했다.
왕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었고, 나라는 이씨 조선으로 폄하하였다. 그들의 호칭을 그대로라면 김왕(金王)이 있고, 최왕(崔王)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였고, 나라도 이씨 조선이 있고, 김씨 조선이나 최씨 조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폄하 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 황실은 “왕공족”이라는 제한된 범주 속으로 편입시켜 황실과 나라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이처럼 국가의 상징을 약화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 바로 언어의 재편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민비라는 표현 자체를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 물론 식민사관적 의도를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역사 연구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단어 자체를 금기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가를 분석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실제 대한제국 당시 내부 기록과 정치 비판 속에서도 민씨 척족 세력을 비판하며 ‘민비’ 혹은 ‘민씨 정권’에 가까운 표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개화파와 반대 정치 세력은 민씨 외척 중심 권력 구조를 비판하면서 명성황후 개인뿐 아니라 민씨 세력 전체를 정치 권력 집단으로 인식하였다.
즉 역사 속에서 호칭은 하나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같은 인물도 시대와 정치적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생전에는 ‘중전’이었다가, 대한제국 체제 이후에는 ‘황후’가 되었고, 반대 세력에게는 ‘민씨 세력의 중심’으로 불리기도 했다. 결국 문제는 어떤 호칭이 절대적으로 선하냐 악하냐가 아니라, 그 호칭이 어떤 권력 구조 속에서 사용되었는가를 읽어내는 데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조선 후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 청나라 말기에도 서태후는 어떤 기록에서는 “노불야(老佛爺)”라 불리며 절대 권력자로 묘사되었고, 다른 기록에서는 국가를 망친 보수 권력의 상징처럼 서술되었다. 프랑스혁명 시기의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왕비, 사치의 상징, 혹은 희생양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 속에서 기억되었다. 이름은 같았지만, 시대가 부여한 의미는 달랐다.
한국 현대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어떤 인물은 “독립운동가”가 되고, 어떤 인물은 “사회주의자” 혹은 “폭도”가 된다. 어떤 사건은 “혁명”이 되고, 어떤 사건은 “사태”가 된다. 결국 권력은 늘 언어를 통해 기억을 조직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민비’라는 표현을 단순히 사용 가능하냐 금지해야 하느냐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일본이 그 표현을 선호했는가, 왜 현대 한국 사회는 그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기억 정치가 작동했는가를 함께 살펴보는 일이다.
역사는 언제나 언어를 통해 재구성된다.
권력은 총칼만으로 지배하지 않는다. 이름을 바꾸고, 호칭을 선택하고, 특정 단어를 반복하면서 사람들의 기억을 길들인다. 그래서 어떤 시대에는 ‘황후’가 강조되고, 어떤 시대에는 ‘민비’가 반복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특정 단어 하나를 무조건 금지하거나 절대화하는 일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이름 뒤에 숨은 권력의 의도를 읽어내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과거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에서 먼저 싸워졌던 것은 칼과 총 이전에 언어였다. 그리고 이름은 그 언어 전쟁의 가장 앞줄에 있었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