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제신문 편집국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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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누가 근대를 설명하는가>
5장. 독립신문은 누구의 신문이었는가
④『독립신문』말한 독립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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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나 제도는 대개 하나의 얼굴만 지니고 있지 않다. 겉으로는 공익을 내세우면서도 그 안에는 개인과 조직의 이해관계가 숨어 있을 수 있고, 정의로운 명분으로 시작한 운동도 현실의 권력과 자금에 기대어야 할 때가 있다. 좋은 뜻으로 만들어진 제도 역시 그것을 주도한 사람과 시대적 환경에 따라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명분과 성과가 모두 거짓인 것은 아니다. 다만 밝은 면만 바라보면 그 이면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을 놓치게 된다.
역사 속 인물과 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문명·개혁·계몽·독립과 같은 말은 밝고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 이름으로 추진된 모든 일이 언제나 순수한 이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개혁에는 그것을 주도한 세력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었고, 계몽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을 구분하는 엘리트의 시선이 담기기도 했다.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외세의 힘에 의존하거나, 민중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민중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근대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시대였지만, 권력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이기도 했다.
『독립신문』도 이러한 근대의 양면성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오늘날 『독립신문』은 조선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근대 언론의 출발점으로 기억된다.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되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전하고, 백성에게 자주독립과 근대적 시민의식을 일깨운 계몽 언론으로 평가받아 왔다. 서재필 또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이끈 근대적 지식인이자 독립사상의 선구자로 소개되었다. 이러한 평가 속에서 『독립신문』은 자연스럽게 항일 민족 언론의 계보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실제 모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민간신문을 표방했지만, 창간과 운영 과정에서 조선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자주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당시 일본을 근대화의 본보기로 높이 평가하였다. 민중 계몽을 내세웠지만, 그 논조에는 개화 지식인들의 정치적 목적과 서구 중심의 문명관이 반영되어 있었다.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면서도 그 신문 자체는 정부와 개화 관료들의 지원을 토대로 출발했다.
이러한 사실이 『독립신문』의 계몽적 성과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독립신문』을 순수한 민족 언론이나 항일 언론의 출발점으로만 기억한다면, 그 탄생에 작용한 정치적 배경과 재정적 토대, 그리고 개화파가 지녔던 현실적 한계를 놓치게 된다. 『독립신문』에는 민중을 깨우려는 계몽의 얼굴과 권력·자금·외세의 이해관계 속에서 움직인 정치적 얼굴이 함께 존재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그 두 얼굴 가운데 밝은 한쪽만을 주로 기억해 왔다. 그러나 역사는 이름과 평가가 익숙할수록 더욱 조심스럽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굳어진 이미지 뒤에는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또 다른 모습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신문』도 예외는 아니다. 신문에 실린 논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항일 민족 언론’이라는 이미지와 쉽게 들어맞지 않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독립신문』이 지닌 두 얼굴과 조선 근대의 복잡한 실체가 함께 드러난다.
그 논설들은 일본의 조선 개입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일정 부분 긍정하거나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일본에 맞서 봉기한 의병 세력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지키려는 주체라기보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낸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독립신문』이 말한 ‘독립’은 과연 누구로부터의 독립이었으며, 그들이 내세운 ‘계몽’은 누구의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본 것이었을까.
그 의문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 1896년 4월 18일 자 『독립신문』 제6호 논설에 나타난다. 이 논설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이 독립국이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이 논설에 따르면 조선의 독립은 조선 민중이 스스로 싸워 쟁취한 결과가 아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물리친 덕분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으며, 따라서 조선인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서술에서 독립의 실질적인 주체는 조선이나 조선 민중이 아니라 일본에 가깝다. 조선의 독립을 일본의 승리가 가져다준 결과로 해석함으로써 일본을 침략과 간섭의 주체가 아니라 조선을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 준 ‘독립의 조력자’로 그려 낸 것이다.
출처: 『독립신문』, 1896년 4월 18일, 제1권 제6호(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제공).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독립이 스스로 지켜내야 할 주권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 강국의 승리로 인해 주어진 결과처럼 설명되기 때문이다. 말은 독립이지만, 그 독립의 문법 안에는 이미 의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독립신문』은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한 일본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청일전쟁을 통해 청인이 조선에서 물러난 일을 다행스러운 사건처럼 표현한 대목은 단순한 반청 의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일본의 무력 개입을 조선 사회의 정화 과정처럼 이해하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 바로 여기에서 독립신문을 둘러싼 불편한 질문이 시작된다.
과연 『독립신문』의 기사처럼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도운 존재였는가. 아니면 청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 한 또 다른 제국이었는가. 그리고 『독립신문』은 이 둘의 차이를 얼마나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일본은 훗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자신들의 침략을 결코 침략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을 낡고 후진적인 사회로 규정한 뒤, 일본의 개입을 문명과 개혁, 질서 회복을 위한 역사적 사명으로 포장하였다. 이른바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제국주의 논리였다. 흥미로운 것은 『독립신문』 초기 일부 논설에서도 이와 유사한 시각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일본은 조선을 도와 근대화를 이끌어 줄 우호적 존재로 묘사되고, 조선 사람들은 일본의 선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96년 7월 16일 『독립신문』 제44호 논설이다. 이 글에서는 일본 공사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에도 『독립신문』의 대일 인식을 논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인 사료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을 단순한 침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조선을 돕거나 개혁을 지원하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조는 제44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초기 『독립신문』에는 청나라의 간섭을 조선 독립의 가장 큰 장애물로 규정하는 논설이 여러 차례 실렸으며, 일본의 메이지 개혁을 조선이 본받아야 할 근대화의 사례로 소개하는 기사도 적지 않다. 또한 조선 정부의 행정과 제도를 비판하면서 일본의 행정 체계와 개혁 정책을 긍정적으로 비교하거나,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만 조선이 진정한 독립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설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기사들은 일본을 조선 독립의 우호 세력 또는 근대화의 동반자로 바라보는 시각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훨씬 더 많다. 일본을 개혁의 모델이나 우호적 존재로 서술한 기사와 논설은 대략 20~30편 정도로 추정되며, 청나라를 비판하거나 반청 성향을 보이는 논설은 30편 이상 확인된다. 두 성향이 함께 나타나는 기사까지 포함하면 40여 편에 이른다는 견해도 있다. 물론 이는 연구자마다 분류 기준이 달라 정확한 숫자로 합의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약 20~30편", "40여 편에 이르는 기사"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 『독립신문』 전체를 친일 신문으로 단정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가 될 수 있다. 실제로 1898년 이후에는 일본 상인의 경제적 침투와 토지 매입, 상권 확대를 비판하는 기사와 논설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일본인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현실을 우려하면서 일본의 대조선 정책을 비판하는 시각도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독립신문』의 대일 인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했던 것이 아니라, 국제정세와 조선의 현실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함께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독립신문』 초기의 상당수 논설은 일본을 조선 독립과 근대화를 도울 우호적 세력으로 바라보았으며, 훗날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문명과 개혁의 전달자'라는 논리와 적지 않은 부분에서 맞닿아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훗날 일본의 식민지 지배까지 예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 일본의 대외정책과 제국주의적 의도를 충분히 간파하지 못했던 한계를 보여 준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독립신문』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내용은 단순한 친일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침략의 정치성이 지워진다는 데 있다. 일본의 군사적 개입은 충분히 문제 삼아지지 않고, 오히려 일본을 불신하는 조선 사회의 태도가 문제처럼 제시된다. 일본의 의도는 선의로 해석되고, 조선 내부의 저항은 무지나 혼란으로 설명된다. 그렇게 되면 계몽의 언어는 어느 순간 제국의 언어와 가까워진다.
이러한 시각 속에서 의병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일본의 개입을 근대화의 동력으로 이해한다면, 일본에 저항하는 무장 세력은 근대 질서를 방해하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립신문』의 일부 논조는 의병을 자주독립의 주체라기보다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폭력 집단처럼 바라보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서 다시 질문해야 한다.
누가 근대였고, 누가 반 근대였는가.
누가 질서였고, 누가 혼란이었는가.
그 판단의 기준은 조선 내부의 주권이었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들어온 문명론이었는가.
물론 당시의 현실을 오늘의 시선으로 단순하게 재단해서는 안 된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은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만, 동시에 일본의 정치·군사적 영향력 아래로 빠르게 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독립’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한 주권국가의 독립과 같은 뜻이 아니었다. 『독립신문』이 강조한 독립 역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기보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에 가까웠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반청 독립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일본 중심의 질서 확대와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 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자주독립이라고 믿는 순간, 일본의 지배적 개입은 충분히 비판되지 못했다. 독립이라는 말이 오히려 또 다른 종속을 가리는 언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신문 계몽이라는 이름의 의구심 그림 이미지 이 대목에서 『독립신문』의 계몽 담론은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신문은 조선 사회 내부의 낡은 질서를 비판하고 근대적 개혁을 강조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 중심으로 재편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조선 사회에 설명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계몽은 누구를 위한 계몽이었는가. 조선 민중이 스스로 주권 의식을 갖도록 하는 계몽이었는가. 아니면 조선 사회를 일본이 주도하는 근대 질서에 적응시키는 계몽이었는가. 물론 『독립신문』과 서재필의 공헌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독립신문』은 한글을 활용해 대중적 공론장을 만들려 했고, 근대적 언론 형식을 조선 사회에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분명 조선 언론사에서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공헌이 있다고 해서 한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공헌과 한계를 함께 보는 일이다. 『독립신문』은 계몽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 계몽은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 현실과 일정 부분 겹쳐 있었다. 독립을 말했지만, 그 독립은 반청 독립에 머물렀고,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경계하지 못했다.
근대의 언어는 언제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문명은 지배의 언어가 되기도 했고, 개혁은 침략의 명분이 되기도 했으며, 계몽은 때로 외세의 시선을 내부화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독립신문』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독립신문』을 단순히 친일 신문이라고 단정하기 위해 다시 읽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결론 역시 또 하나의 단순화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의구심을 갖고 묻는 일이다. 『독립신문』이 말한 독립은 어떤 독립이었는가. 그들이 말한 계몽은 누구의 눈으로 조선을 바라본 것이었는가. 일본을 문명과 개혁의 동반자로 보았던 그 시선은 훗날 식민지 지배 논리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는가.
역사는 의심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미 정답처럼 굳어진 기억을 다시 묻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복잡한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독립신문』은 근대의 가능성을 보여준 신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의 한계와 오판을 보여준 신문이기도 했다. 그 안에는 자주와 개혁의 열망이 있었지만,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순응과 착각도 함께 존재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근대를 빛의 역사로만 기억해 왔다. 그러나 근대는 언제나 그림자를 동반했다. 『독립신문』의 논설은 바로 그 그림자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 불편한 사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조선 근대사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는 한 인물이나 한 신문을 찬양하거나 단죄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 시대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무엇을 선택했고, 무엇을 착각했는지를 성찰하는 일이다.
그래서 『독립신문』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은 근대 언론의 출발점이었지만, 동시에 계몽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의구심을 남긴 신문이었다. 자주를 말했으나 일본의 힘을 빌린 독립을 긍정했고, 민중을 깨우려 했으나 제국주의의 그림자를 충분히 보지 못했다. 바로 그 모순 속에서 우리는 조선 근대의 가장 불편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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