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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청일·러일전쟁으로 조선 병탄(3)
  • 기사등록 2026-09-28 16:30:11
  • 기사수정 2026-09-28 16: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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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훈 칼럼니스트.1875년 9월, 강화도 앞바다에 측량하는 척하며 불법 입항한 일본 ‘운양호(雲揚號)’의 첫 포성이 울렸다. ‘미 페리의 흑선(黑船)(1853)’의 복사판으로, 국가만 바꾼 ‘똑같은 굴욕’을 조선에 안긴 괴물의 출현이었다. 꼭 22년 만이다. 그런데, 조선은 이때, 저 일본 ‘에도 막부’처럼, 이 ‘괴물’에 ‘잽싸게’, ‘현명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로써,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막지 못하고 이듬해 강화도 조약(1876.1)에서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8)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설계한 ‘조선 병탄(倂呑)’의 철로가 깔리기 시작했다. 야마구치 시골 서생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주장했던 ‘정한론(征韓論)’의 꿈이 비로소 날개를 펼친 셈이다. 


여기서 잠시, 에도 막부 말년, 일본의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 교육자로 29세에 요절한 ‘요시다 쇼인’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가 일본의 ‘조선 병탄’과 ‘동남아 침탈’에 미친 영향은 필설로 표하기도 어려울 만큼 지대해서다. 그는 1854년 페리 함대를 타고 미국에 밀항하려다 실패해 투옥 중에 <유수록(幽囚錄)(1854)>을 썼다. 여기서 그는 열강으로 입은 피해보상을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임진왜란처럼 조선 재침(정한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 더 나아가 ‘아(亞)제국주의적 보상론‘을 설파해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이어지는 동남아 침탈의 근거를 제공했다. 


문제는, 막부의 대숙청(1859)*1에 참형당하는 그의 죽음을 보고 제자들이 대오각성해, 스승의 사상을 실현하려는 ‘광기 어린 혁명가’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그는 1857~1858년, 고작 1~2년 남짓한 기간에 70~90명 제자를 배출했다 하는데, 여기에 메이지 유신의 성공 주역들이 대다수 포함됐다 하니 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제자 중에는 우리가 잘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해 가스라-태프트 조약을 체결한 내각총리대신 가스라(桂太郎), 조선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寺内正毅), 2대 조선 통감인 소네(曽禰荒助), 그리고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山縣有朋), 군사 천재 다카스기(高杉晋作) 등 이루 다 소개할 수가 없을 정도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정책(특히 대외정책)을 기획한 핵심 관료로서 정한론을 철저히 실현하는 급행열차를 타게 된다. 


사실상 한 혁명가가 조선 정복과 동남아 침략 이론을 제공하고, 그의 제자를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로 키워 이를 현실화하더니 끝내는 태평양전쟁마저 일으키고 그 패배로 자국을 철저한 파멸로 이끈다. 실로 요시다 쇼인이 그 뿌리에 있었다. 


청일전쟁도.이제 조선 병탄을 위해 해야 할 건, 조선에 가장 유력한 배후 열강들을 하나씩 하나씩 내쫓는 일이었다. 그 첫 총구가 청나라를 겨냥했다. 드디어 청일전쟁(1894.7~1895.4)(그림 1)의 포성이 터졌다. 일본은 그 서전을 ‘상습적인 기습’*2으로 제압했다. 1894년 7월, 정식 선전포고도 없이 아산 앞바다 풍도 인근에서 청의 수송선과 군함을 기습 공격해 단번에 승기를 잡았다(풍도해전 1894.7.). 곧이어 아산 성환과 청의 한반도 최대 거점인 평양성을 공격해(성환ㆍ평양 전투, 1894.7~9.) 근대식 소총과 정교한 포병 전술로 순식간에 청을 패퇴시켜 육상에서 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같은 달, 압록강 하구 서해상에서 청의 자랑인 ‘북양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가 충돌, 청의 주력 군함들을 대거 침몰시키며 서해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했다(서해해전, 1894.9.). 이듬해 2월, 산둥반도 기지에 고립된 청나라 ‘북양함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일본군에 압박당해 전멸당한다. 개전 후 9개월 만에 끝났다. 실로 허망한 패전이었다. 결국, 시모노세키 조약(1885.4.)이 체결되면서 청일전쟁은 막을 내린다.  


청은 양무운동(洋務運動, 1861~1894)*3을 통해 아시아 최대 거함인 정원함, 진원함을 보유했으나, 실상은 황궁이 해군 예산을 빼돌려 신형포탄과 화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심지어는 포탄 대신 모래를 채워 넣은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함선 크기보다 속사포 개발에 집중해, 서해해전에서 청의 느린 포격 회전력을 빠른 기동력으로 유린해 함포 과학과 전술 우위로 승리했다. 전략에서도 패했다. 일본군은 대본영(大本營)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반면, 청은 국가의 군대라기보다 이홍장 개인 사병에 가까운 ‘북양군’만 싸웠다. 남방함대나 다른 군대는 ‘강 건너 불 보듯’ 방관했다. 이게 거대 제국 청의 말년 모습이었다.  


이제 조선 병탄의 커다란 걸림돌 하나가 제거되었다. 다음은 러시아였다. 일본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전은 계속됐다. 이번엔 러의 태평양함대 본거지인 요동 반도 여순항을 급습했고, 동시에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 군함을 공격했다(여순항 기습과 인천해전, 1904.2). 이 기습으로 러시아 해군을 여순항 내에 고립시킨 후 육지에서 포위해 무려 일본군 6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끝에 마침내 러시아 요새를 점령해 러의 태평양함대를 전멸시켰다(여순항 포위전, 1904.8~1905.1). 육전도 벌어졌다(봉천 전투, 1905.3). 양군 총 60만 명이 맞붙은 대규모 전투였다. 


발트함대 항해도.일본군은 극심한 병력 부족과 보급한계로 불리했으나 러시아 지휘부의 판단 착오와 퇴각령으로 봉천을 점령한다. 마지막 전투는 쓰시마 해전(1905.5.27.~28)이었다. 여순 함대가 전멸하자 러시아는 북해에 있던 최정예 ‘발트 함대’를 지구 반 바퀴를 돌려 파견했다. 일본 연합함대는 길목인 대한해협에서 지질대로 지친 발트 함대를 포위해 단 이틀 만에 러시아 군함 21척을 침몰시키고 5,000명 이상의 군인을 수장시키며 세계 해전사상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둔다. 이 해전의 패배로 러시아는 전쟁 의지를 완전히 상실해 미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1905.9)에 서명한다. 


일본의 승인(勝因)은 남해안과 쓰시마 일대의 해양ㆍ기상(안개) 데이터를 완벽히 파악했고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무선전신기’를 전 군함에 배치해 적함의 동태를 사전에 인지한 점이 주효했다. 이를 토대로 유리한 해전 진형(T자형)을 구축해 발트 함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또 영일동맹의 덕도 봤다. 러시아 동북아 남진을 경계하던 영국은 수에즈 운하 통과를 거부해 아프리카 남단을 돌게 했고, 전 세계 석탄 보급기지를 통제해 러 함대 항해에 저질 석탄을 쓰게 했다. 실로 7개월 동안 3만km를 항해해(그림 2) 승조원은 이미 탈진상태였다. 러의 악재는 또 있었다. 1905년 1월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해 내부 폭동 진압이 전쟁보다 더 시급했던 점이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서태평양과 동해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독점했고 영국에 버금가는 세계적 위상을 확보하게 된다. 앞서, 청일전쟁에서는 청으로부터 배상금 2억 양(일본 예산의 4년 치가 넘는 약 3억 6천만 엔)을 챙겨 금본위제를 확립해 국제금융시장에 진입했고, 야하타 제철소를 건립해 중화학 근대 산업화를 완성할 거대 자본을 축적했다.  


이제 조선 ‘완전 병탄’의 타임라인은 초시계처럼 빨라졌다. 러일전쟁 초에, 한반도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한일의정서(1904.2)를 강제로 체결하고, 독도를 약탈(1905.2)해, 러 함대 감시용 망루를 설치하고, 승기를 잡자 대한제국과 필리핀에 대한 이해를 놓고 미일 양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을 체결하더니 곧이어 을사늑약(1905.11)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한일합방)’를 안겼다. 마침내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일본의 흑선(黑船)(운양호)’이 강화도에 들어서고 겨우 35년 만에, 무릇 518년을 이어온 조선이, 5천여 년을 이어온 한반도 역사가 끊어진 것이다! 사실상 중국(청나라)이 한반도를 손 놓자마자였다. 그야말로 ‘사대교린(事大交隣)’으로 바다를 멸시하고 대륙(중국)만을 바라봤던 조선의 정책이 부른 결과였다.  


드디어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에 근거해 완벽하게 조선 병탄이 끝나자, 그의 제자들은 이제 그의 ‘아(亞)제국주의적 보상론’으로 총구를 돌린다. 그리고 그 걸림돌 미국이 마침내 그들 총구의 최종 표적이 된다. (4부에 계속) 

 

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청일ㆍ러일전쟁으로 조선 병탄(3) 인포그래픽.*1 막부의 대숙청(1859): 막부가 저항세력을 제거한 사건으로,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이라 한다. 당시 요시다 쇼인은 ‘막부 존재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핵심관료 암살’에 실패해 투옥됐는데, 조사관이 묻지도 않은 암살 계획을 스스로 자백해 참형을 자처했다. 자신의 사회개혁 한계에 절망한 탓으로 보인다. 문제는, 허무하고 극적인 그의 죽음 직전에 남긴 짧은 <유혼록(留魂錄)>을 보고 제자들이 대오각성한다는 점이다. 그 내용을 각색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 한 몸 죽어 대화혼(大和魂)이 살아난다면 그게 나의 큰 업적이다. 봄에 피는 꽃이 있고 가을에 맺는 열매가 있듯이, 내 천명은 여기에 다하니 부디 내 뜻을 이어 국가 대업의 거름이 되어다오.” 

*2 상습적인 기습전: 역사상 대부분의 문명권은 전쟁을 시작할 때 최소한의 ‘외교적 명분과 선전(宣戰)’을 거친 뒤 전술적 기습을 노렸다. 예컨대,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기원전 3세기~2세기)에서도 ‘공식적인 선전절차’가 있었고, 심지어 히틀러가 폴란드를 기습(1939)할 때도 ‘자작극 명분 조작’(나치 친위대에게 폴란드 군복을 입혀 독일을 공격게 함)(글라이비츠 사건)을 했다. 일본처럼 ‘국가적 정체성’ 수준으로 패턴화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들 문화에서 나온 소위 ‘닌자거북이’ 전술이라 할 것이다. 헤이그 협약(1907) 이후, 서구 열강은 “전쟁 전 명확한 이유가 담긴 선전포고나 조건부 최후통첩을 해야 한다.”는 규범을 정했다. 일본은 이를 수용하는 척하면서도 개전 때마다 어겼다. 진주만 기습(1941.12)이 그 대표적인 예다. 

*3 양무운동(洋務運動, 1861~1894): 청나라 말기 관료 주도의 군사 중심 근대화 운동으로, 서양 기술과 문물을 수용하여 국력을 증대시키려 한 자강운동이다. 그러나 정부의 내부부패로, 강병(强兵)을 위한 예산 운용의 합리화가 이뤄지지 않았고,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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