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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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4장. 임오군란은 정말 '군란'이었는가.
⑤ 역사용어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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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를 설명하는 언어를 선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 속에는 언제나 권력과 시대의 시선이 개입한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 용어를 객관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 용어들은 대부분 특정한 정치적 환경과 권력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선택되었다. 다시 말해 역사 용어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사건과 인물을 어떻게 기억하게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치적 장치였다.
우리는 이미 너무도 익숙하게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임오군란’, ‘동학난’, ‘을사보호조약’, ‘합방’, ‘사변’, ‘혁명’, ‘폭동’, ‘의거’, ‘반란’ ‘민비시해’ 같은 표현들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정작 그 안에 담긴 정치성과 권력 구조는 잘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사 속 용어는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을 통과한 결과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임오군란’이라는 표현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1882년 사건을 자연스럽게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군란’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미 사건에 대한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난(亂)’은 국가 질서를 어지럽힌 반란과 혼란을 의미한다. 즉 사건의 원인과 구조보다 “질서를 파괴한 폭력”이라는 인상이 먼저 강조된다. 그러나 실제 임오사건의 배경은 단순한 폭동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당시 구식 군인들은 장기간 급료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고, 어렵게 지급된 군량미조차 썩은 쌀과 겨가 섞인 상태였다. 『고종실록』에는 군인들이 지급된 군량 문제로 격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 일본식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대한 특혜와 기존 군영에 대한 차별이 겹치면서 군인들의 불만은 극도로 커지고 있었다.
즉 사건은 단순한 폭력 난동이 아니라 국가 개혁 과정 속에서 배제된 군인 집단의 저항이라는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 입장에서 무장 군인의 집단행동은 어디까지나 국가 질서를 위협한 반란이었다. 결국 사건은 ‘군란’으로 규정되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용어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권력이 결정한다.
동학농민운동 역시 그러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조선 정부와 지배층은 ‘동학난’ 또는 ‘동비(東匪)의 난’이라 불렀다. 같은 사건이지만 누구의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혁명이 되기도 하고 난(亂)이 되기도 한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들의 저항으로 평가받지만, 1980년 군사정권 시절 공식 용어는 ‘광주사태’였다.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에는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과 희생이 담겨 있지만, ‘사태’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혼란과 소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름 하나가 사건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의 정치학을 가장 전략적으로 활용한 집단 중 하나가 일본 제국주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 침탈을 침략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보호’와 ‘개혁’이라는 표현을 앞세웠다. 1905년 을사조약도 일본은 ‘한국보호조약’이라 불렀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전혀 달랐다. 대한제국은 일본군의 무력과 외교적 압박 아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호’라는 단어는 침략과 강압이라는 본질을 가리고, 마치 일본이 조선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1910년의 식민지화 역시 ‘한일합방(日韓合邦)’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합방’이라는 단어는 두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합의하여 하나가 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흡수된 것이었다. 대등한 결합이 아니라 일방적인 지배와 병탄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는 ‘합방’이라는 표현보다 ‘병합’ 또는 ‘강제병합’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이것은 단순한 단어의 수정이 아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이며,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보다 정확하게 드러내려는 노력이다. 결국 역사는 사실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건보다 그 사건에 붙여진 이름을 먼저 기억한다. 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사건을 지배하기 전에 이름을 지배하려 한다. 어떤 사건을 혁명이라 부를 것인가, 난이라 부를 것인가, 보호라 부를 것인가, 침략이라 부를 것인가는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역사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변(事變)’이라는 표현 역시 매우 흥미로운 사례다.
일본은 1931년 만주 침략을 ‘만주사변’이라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관동군이 남만주철도를 스스로 폭파한 뒤 이를 중국군의 공격으로 조작하여 침략의 명분으로 삼은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는 계획된 군사 침략이었음에도 일본은 이를 ‘전쟁’이나 ‘침략’이 아니라 단지 ‘사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사변’이라는 용어는 전면전보다 작은 국지적 충돌이나 우발적 정치 사건처럼 들리게 만드는 효과를 가졌다. 결국 용어는 침략의 폭력성과 책임을 희석시키는 정치적 장치로 사용된 셈이다. 그러나 사실 일본이 이러한 방식의 언어 전략을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적용한 대상은 조선이었다.
그것이 바로 ‘을미사변’이라는 명칭이다.
한자어 ‘사변(事變)’은 문자 그대로 보면 단지 “일어난 변화” 혹은 “발생한 사건”을 의미할 뿐이다. 이 표현 속에는 누가 폭력을 행사했는지, 어떤 권력이 그것을 기획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 침략, 학살처럼 가해와 책임의 방향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변’이라는 용어가 선택되는 순간 사건은 마치 복잡한 정치 변동이나 우발적 충돌처럼 인식되기 쉽다. 강만길이 지적했듯이 역사 용어는 현실을 설명하는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실제로 1895년 을미년에 발생한 사건의 본질은 일본 공사관 세력과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한 조직적 정치 폭력이었다. 그러나 ‘을미사변’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폭력의 구조를 지워 버린다. ‘을미’라는 간지 표기는 단지 시간적 좌표만을 제공할 뿐이며, ‘사변’이라는 표현 역시 단순한 사건 발생 정도로 의미를 축소시킨다. 결과적으로 이 명칭 속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자행한 궁궐 침입과 왕비 살해라는 본질이 언어의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명성황후 시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 역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시해(弑害)’라는 개념 자체가 본래 “내부 반역에 의한 군주 살해”를 의미하는 정치적·윤리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중국 송나라의 사전류 문헌인 『류편(類篇)』은 “弑, 殺也. 自外曰戕, 自內曰弑(‘시’란 죽인다는 뜻이다. 외부인이 죽였을 때는 장(戕)이라 하고, 내부인이 죽였을 때는 시(弑)라 한다)”라고 설명한다. 『춘추』와 『좌전』에서도 “凡自虐其君曰弑, 自外曰戕(자기 군주를 죽이는 것을 시라 하고, 외부인이 죽이는 것은 장이라 한다)”라고 하여 이를 명확히 구분한다. 즉 ‘시(弑)’라는 용어는 본래 신하나 내부 권력이 군주를 죽이는 반역 행위를 뜻하는 개념이었다. 『강희자전(康熙字典)』 역시 “下殺上曰弑(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이는 것을 시라 한다)”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라는 개념이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정치적 반역과 권력 찬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자학적으로 보더라도 ‘弑’자는 단순한 살해가 아니라 윗사람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는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반면 일반적 살해를 뜻하는 ‘살(殺)’은 정치적 위계나 윤리적 판단을 전제하지 않는다.
즉 ‘시(弑)’와 ‘살(殺)’은 문자 구조와 의미 체계 자체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그럼에도 근대 이후 한국사 서술에서는 관행적으로 ‘명성황후 시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왔다. 문제는 이 용어가 독자의 인식 속에 자연스럽게 “내부 반역”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 가해 주체는 일본 공사관 세력과 일본 낭인들이었다. 다시 말해 사건의 본질은 내부 신하의 반역이 아니라 외세에 의한 궁궐 침입과 왕비 살해였다.
「명성황후는 시해가 아니라 살해다」그림 이미지결국 ‘시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순간 사건의 책임 구조는 미묘하게 흐려진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직적 폭력이라는 본질이 희석되고, 사건은 마치 조선 내부 권력 갈등 속에서 발생한 비극처럼 인식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용어의 정치성이다.
실제로 일본인 후손들이 명성황후 능을 찾아와 선조들의 죄를 대신 사죄한 사례도 있었다. 그들은 이 사건이 일본 세력에 의한 폭력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지금도 교과서와 학술 서술 속에서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관행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가 역사 인식에 얼마나 깊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용어의 선택은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방향을 결정하는 문제다. ‘시해’라는 표현이 독자의 인식을 내부 반역 구조로 끌어당긴다면, ‘살해’ 혹은 ‘피살’이라는 표현은 사건의 책임을 외부 권력의 폭력으로 다시 돌려놓는다. 결국 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특정한 용어는 특정한 역사 인식을 반복적으로 주입한다. 그래서 역사 연구는 단순히 사건을 정리하는 작업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왜 그런 용어가 선택되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누가 그렇게 불렀는가. 왜 그런 표현이 교과서 속에서 반복되었는가. 그리고 그 언어 속에서 무엇이 지워졌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따라서 ‘을미사변’이라는 표현 역시 단순한 역사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폭력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언어적 장치였으며, ‘명성황후 시해’라는 표현 또한 문자적·사전적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사건의 책임 구조를 왜곡할 가능성을 가진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사건을 ‘을미왜변’, ‘명성황후 살해’ 혹은 ‘명성황후 피살’로 다시 부르려는 시도는 단순한 감정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개념의 정확성을 회복하고, 역사적 책임의 방향을 바로 세우려는 역사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권력은 왜 이렇게 용어에 집착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은 사건보다 이름을 먼저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정의와 변화, 민중의 열망을 떠올린다. 반면 ‘폭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질서와 파괴를 먼저 떠올린다. 즉 용어는 사건을 바라보는 감정과 판단을 먼저 결정한다. 권력은 바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 속 권력은 언제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언어를 선택하려 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 세력은 왕정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왕실 상징과 명칭을 대대적으로 파괴하였다. 새로운 혁명 달력을 만들고 기존 질서의 언어 자체를 바꾸려 하였다.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기억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스탈린 시대 소련 역시 비슷했다.
정치적으로 숙청된 인물들은 사진 속에서도 사라졌고, 교과서와 기록에서도 삭제되었다. 권력은 단지 사람을 제거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억되기를 원했다.
결국 역사 용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사건을 바라보게 만드는 틀이며, 기억의 방향을 결정하는 권력의 언어다. 그래서 역사 연구는 단지 사건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왜 특정한 용어가 선택되었는지를 묻는 작업에 가깝다.
왜 ‘군란’인가.
왜 ‘혁명’인가.
왜 ‘합방’인가.
왜 ‘사변’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기록 뒤에 숨어 있던 권력의 구조를 보기 시작한다. 역사는 흔히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는 승자가 선택한 용어 속에서 기억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깨닫게 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기억과 해석의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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